낭만은 보는 이들의 몫

일본종주 22일 차 : 나고야~비와호 (87Km)

by 루로우

나고야에서 하루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데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고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늦잠을 자서 아침 8시에 일어나고 말았다. 항상 마음만은 기필코 새벽 5시에 출발할 거라며 잠에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종주 내내 지켰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아침 8시도 한국에서보다는 월등히 아침형 인간인 쪽이었다.


나고야의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높았다. 나고야 시내는 다른 도시들보다 자전거에 대한 배려가 뛰어났다. 보통 도시에서는 자전거 차선 표시를 해두는 정도에 반해 자전거 전용 도로와 차도를 구분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안전한 금속 펜스까지 쳐져 있었다. 생활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을 위한 배려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 도시의 공간 구석구석에서 물씬 풍기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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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시내를 벗어나도 주변이 전부 시가지였기에 빠르게 속도를 내진 못했다. 아침에도 밥을 먹고 출발하지 않아 점심까지도 어제 산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것이 전부였다. 간간히 편의점에 들러 과자나 에너지젤로 체력을 보충했다.


가던 도중 갑자기 정차하고 있는 차 앞에 여성 한 분이 서 계셨다. 그러더니 나를 손짓으로 멈춰 세웠다. ‘갑자기 뭐지…?’하고는 내가 잘못이라도 한 건지, 걱정 반 불안 반과 함께 자전거를 세웠다. 그녀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과자 하나를 건네고는,


“일본 종주 중이시죠? 이거라도 드셔요. 힘내세요!”이라고 내게 말했다.


젊은 여성 분에게 종주 응원과 함께 선물이라니… 뒤에서 나를 보고는 굳이 나를 지나치고 앞으로 가서 차를 세운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몸 둘 바를 몰라 머쓱한 표정과 함께 쑥스러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오늘의 목적지인 비와호로 가는 길에는 세키가하라라는 도시가 있는데, 오늘 아침 체크아웃을 하던 중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 “세키가하라에는 큰 화물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조심해야 해.”라며 걱정 어린 귀띔을 해 주었다. 화물차들과 목숨을 내놓고 라이딩하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세키가하라는 지난번에 도쿄로 갈 때의 통행량보다는 차량이 훨씬 적어 그렇게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 하교 시간이었는지 떼를 지어 걷는 알록달록한 모자의 초등학생들이 길에 보였다.


“일본 종주?”


“와! 일본 종주다. 일본 종주!”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쳐가자, 푯말을 보았는지 초등학생 특유의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들이 연신 들려왔다. 놀림을 받는 것 같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학생들로부터 멀어질 때였을까,


“힘내요!”


“힘내세요! 파이팅!”


많은 학생들이 나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응원해 준 것이었다. 나도 멋쩍게 고개를 돌리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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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즈음 세키가하라를 넘어 드디어 비와호 근처에 있는 나가하마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오후 4시인데도 해가 이미 지평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둘러야만 했다. 어제부터 상상했던, 꼭 해가 지는 비와호의 노을을 바라보며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캠핑을 하기 전 씻을 곳을 찾아야 했다. 캠핑장에서 5킬로 떨어진 ‘비와코유(Biwakoyu)’라는 목욕탕에 도착했다. 탈의실은 매우 낡았고, 목욕탕은 정말 좁았다. 과장을 보태서 내 예전 자취방 넓이와 비슷할 정도였다. 두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온탕 하나와 열탕 하나, 심지어 냉탕은 탕이라고 하기엔 우물에 어울릴 법한, 한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크기였다. 손님들은 거의 대부분 70대를 넘은 노인들뿐이었다. 노인들은 30대인 나를 낯설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완전히 로컬이군.


해가 지기 전에 캠핑장에 가기 위해 거의 탕에서 5분, 샤워를 5분 만에 잽싸게 마치고 후다닥 뛰쳐나왔다. 수건이 없어서 자전거를 탈 때 입었던 져지로 대충 내 몸을 닦았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게스트하우스나 목욕탕에서 수건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근데 수건은 둘째치고 드라이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 목욕탕은 드라이기까지 제공하지 않는 건가? 머리는 대체 어떻게 말리라고? 혹시나 해서 카운터에 물어보자 알고 보니 카운터에서 빌리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체중계가 보여서 재었던 몸무게는 64kg. 종주 한 달 동안에 총 6kg가 빠졌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한 달에 6kg를 빼고 싶다면 매일 100킬로씩 자전거를 타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목욕을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도 해는커녕 석양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하늘이었다. 거리는 캠핑장까지 5킬로나 남아 있었다. 도중에 마트에 들러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도 샀다. 장도 쏜살같이 5분 만에 보고 나왔는데, 하늘은 마트에 들어올 때보다도 더 어두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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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 맵 리뷰


정확히 5시 37분, 오늘 묵을 비와호 주변의 캠핑장에 도착했다. 홋카이도에서 캠핑을 할 때도 느꼈지만 사실 무료 캠핑장은 캠핑장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공터에 가까웠다. 이용할 수 있는 시설도 공중화장실이 달랑 하나 있는 것이 전부다. 사실상 캠핑이 아니라 공중화장실 옆에서의 노숙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비와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하늘이 어두워져 버린 뒤였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오랜만에 텐트를 쳤다. 홋카이도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캠핑을 하지 않았으니… 혼자였다면 무서웠겠지만 다행히 다른 텐트가 하나 있었다. 호수 쪽에서도 낚시를 하는 사람의 인기척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어두워지자 슬슬 갈 채비를 하는 듯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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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나 나올 법한 석양을 배경으로, 맥주와 영화를 보는 모습을 찍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분위기라도 내보고자 태블릿에서 모닥불 영상을 켰다. 그리고 마트에서 사 온 스시와 과일을 꺼내서 먹었다. 칠흑 속에서 비와호 호수의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만이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리 다운로드하여 두었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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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날씨가 꽤 쌀쌀해서 오들오들 떨면서 저녁을 먹었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을 본 한 지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죽인다 낭만”


“너무 힘들어요”


“역시 낭만은 보는 이들의 몫”


결국 고생은 지금의 나의 몫이지만, 낭만은 보는 이들의 몫이자, 나중에 돌아와서 기억을 돌이킬 때의 나의 몫일 것이다. 이만한 고생도 모두 추억이 되어서 나중에는 회상하고 있으리라.


옆 텐트에서는 예능을 보고 있는지 패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텐트를 들락날락거리던 도중 어쩌다가 동시에 그 사람과 나와서 마주쳤다. 처음 왔을 때에는 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굉장히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50대 정도의 남자였다.


“자전거로 비와호 일주하시는 건가요?”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건넸다.


“아뇨. 일본 종주 중입니다.”


“이야, 멋지시네. 지금 저는 바이크 투어 중입니다. 저기 세워둔 바이크가 제 바이크예요.”


그러고 보니 캠핑장 입구에는 한 바이크가 세워져 있었다. 이전까지의 경계심은 눈 녹듯 몇 마디 대화에 사라졌다. 우리는 각자 바이크, 자전거로 여행을 하고 있는 비슷한 동지였다.


“혹시 자전거 봐도 돼요?”


“아? 네. 맘껏 보셔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저도 지금 내년에 자전거 호주 일주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게 로드인가요? 이 자전거는 여행하기에 좋은 자전거인가요?”


호주라고? 도시를 벗어나면 정말 한 200킬로마다 마을이 있을 것 같은 그곳에서 자전거 일주라니… 나는 일본인데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나이에도 바이크 투어를 하면서 자전거 호주 일주까지 꿈꾸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서로 응원의 한마디와 함께 텐트로 돌아와서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왱왱거리는 오토바이 소리 때문에 잠들기가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바이크 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왜 폭주족이라고 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 정도면 바이크 소리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박자에 맞춰서 왱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코루(コール)’라고 부르는데, 필자가 얼마나 잠을 못 잘 정도였냐면 유튜브에 ‘コールバトル’라고 검색하면 얼마든지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고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번엔 추위가 나를 괴롭혔다. 핫팩은 큰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냥 지금 출발해서 페달이라도 밟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잔 거지?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어 제발 새벽 5시이길 빌었지만 야속하게도 휴대폰 화면 시간은 아직도 새벽 2시였다.


바람 때문인지 자꾸 텐트 주변으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속으로 ‘바람 소리겠지, 바람 소리겠지.’라고 계속 억지로 되뇌었지만 ‘과연 그럴까?’라고 소리가 내게 되묻는 것처럼 반복해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지퍼를 열고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주변엔 어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잠은 포기하고 이어폰을 끼고 아까 보던 영화를 켰다. 사실상 뜬눈으로 비와호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제 다시는 캠핑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노숙은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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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3195.HEIC 이 날 보았던 특이한 건물. 뭔가 랜드마크인 것 같았지만 검색해 보니 그냥 태양광 발전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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