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23일 차 : 비와호~교토 (101Km)
결국 동이 틀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뭐, 결국 숙소 대신 캠핑을 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서둘러 라이딩을 출발하기 위해 여명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에 떠느니 페달이라도 밟으면 춥지 않을 테니까.
어제 먹고 남은 쓰레기들도 봉지에 담아서 정리했다. 새벽 5시 반부터 시야가 주변이 보일만한 상황이 되자마자 텐트를 부산스럽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부작대는 소리에 옆 텐트 사람이 깼을까 봐 괜히 미안해졌다. 정리를 마칠 때 즈음 옆 텐트 사람도 잠에서 깨었는지, 일어나서 정리를 시작했다. 서로를 향한 응원의 한 마디와 함께 먼저 자전거를 끌고 캠핑장을 빠져나왔다.
비와호는 일본이 지정한 ‘National Cycle Route’라는 유명한 사이클링 코스 중 하나로, 비와호 주변을 따라 파란 선으로 라이더를 위한 코스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확실히 구글 지도를 일일이 보며 길을 찾는 것보다 파란 선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라이딩하기가 훨씬 편했다. 이른 시간부터 내적 친밀감이 느껴지는 쫄쫄이의 라이더들이 자주 보이곤 했다.
서울시의 면적보다 넓다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 비와호.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비와호는 정말 훨씬 넓고 바다 같다는 말이 어울리는 광활함을 드러냈다. 저 아득한 수평선 끝이 바다로 이어질 것만 같지만 육지에서 멈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자전거를 끌고 와서 비와코 일주를 할 수 있을까?
점심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햇빛도 있었지만 높은 적란운 사이로 심심찮게 으르렁대는 천둥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저마다 다른 색깔로 물들어 있는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마치 실제 하늘이 아닌 수채화로 그려낸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한 캠핑장 주차장의 아스팔트 바닥에서 점심으로 어제 마트에서 산 바나나와 귤을 먹던 도중, 갑자기 정말 몸을 움찔할 정도로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차장에서 내려 어딘가로 걸어가던 한 노인이 “아이고야!”하면서 크게 소리칠 정도였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자마자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비처럼 1분도 안 되어 소낙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런 비는 극적인 연출인 줄로만 알았다. 하필 이럴 때, 비를 피할 지붕조차 보이지 않는 사방이 열린 길을 달리고 있었다.
겨우 비를 면할 정도로 좁은 한 구조물 아래에 잠시 몸을 피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풀숲에서 뭔가 팟 하고 튀어나와서는 도로 쪽으로 뛰쳐나왔다. 긴 꼬리를 달랑거리며 쏜살같이 움직이는 적갈색 털의 동물, 바로 여우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으려고 갑자기 뛰쳐나온 걸까? 실제로 야생 여우를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넋을 놓고 무단횡단 중이었던 여우를 바라보았다. 정말 코 닿을 거리에 있었는데. 아차, 하고 뒤늦게 휴대폰을 꺼냈지만 여우는 이미 풀숲으로 종적을 감춰버린 뒤였다.
20여 분이 지나도 비의 기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기에 비를 맞으면서 다시 출발했다. 가던 도중 보이던 넓은 다리 아래로 피신했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라이더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한국에서도 자주 보이는 50~60대 정도의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모인 자전거 동호회인 것 같았다. “일본 종주라고? 대단해! 이 사람, 홋카이도에서 왔대.” 아주머니 한 분께서 나의 푯말을 보시고는 호들갑 한 스푼을 얹은 응원의 한마디를 던져 주셨다.
비는 오랜 시간 내리지 않고 그쳤지만 강도가 워낙 셌던 탓인지 그 짧은 시간에도 길바닥에는 물웅덩이들이 곳곳에 고여 있었다. 비와호의 끝자락에 있는 오쓰라는 도시를 지나, 오후 3시도 안 되어서 교토에 도착했다. 거리가 긴 것은 아니었지만 100킬로는 탄 상태였다. 추위 덕분에 새벽 6시에 출발하니 대낮에 라이딩이 끝나버렸다.
정말 갑자기 뜬금없이 시야에 많이 보이는 서양인들, 그리고 한국어가 정말 오랜만에 귀에 들려오자 단박에 내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내가 서 있는 곳이 교토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체크인 시간은 오후 4시라 일단 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카모 강을 따라 자전거를 밟았다.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까 전과 다르게 은은한 햇살이 강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한국의 한강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카모 강은 평화롭고 잔잔한, 혹은 쓸쓸하다고 할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그런 카모 강의 평화로움도 잠시, 기온 거리로 올라가자 엄청난 인파에 맥을 못 출 지경이었다. 도쿄와 관광객 수는 비슷한데 교토는 거리가 좁아 훨씬 더 붐비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쫄쫄이 복장과 뒤에는 큼지막하게 ‘일본 종주’ 푯말까지 달고 있으니,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지경이었다. 뒤에서 걸어오는 한 일본 여고생 무리의 시선이 자꾸만 느껴졌다. 이래선 자전거와 함께는 절대 못 다니겠다 싶어 얼른 체크인을 하러 숙소로 방향을 돌렸다.
카운터에는 일본인이 아닌 한 외국인 여성이 있었다. 근데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본어가 심하게 서투르고 답답했다. 내가 일본어로 말해도 말을 좀처럼 알아듣지 못했다. 결론은 역시 예상대로 체크인은 오후 4시부터 할 수 있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남질 않아 로비에 있던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았는데 충전이 잘 되질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콘센트에 꽂아봐도 매한가지였다. 충전 표시가 1초마다 깜빡거리면서 되었다 안되기를 반복하는 증상을 보였다. 이대로 충전이 되질 않는다면 휴대폰이 꺼져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수건은 대여만 해도 200엔이길래 차라리 100엔 샵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로비뿐만 아니라 배정된 침실에서도 충전은 여전히 되지 않았다. 내 충전기가 문제인가? 그렇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숙소에서는 잘만 충전이 되었다. 휴대폰이 문제인가? 태블릿도 충전이 되지 않았다. 오늘 비를 맞아서 그런가…? 일단 세탁실로 올라가서 동전을 넣고 빨래를 돌렸다. 충전은 포기하고 내일 일찍 일어나 카페에서 하자고 생각했다. 침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었고, 주방이나 샤워실은 모두 2층이라 매번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라이딩 후라 허벅지가 터질 것만 같았다. 계단이 끝나는 곳마다 숙박객들을 괴롭힐 생각으로 뒀는지 싶은 지압매트가 너무 아팠다.
도미토리는 천장이 뚫려 있어, 불을 꺼도 너무 밝고 최소한의 방음조차 되지 않았다. 매트는 빨래를 제대로 한 건지 오물자국들이 묻어 있었다. 세탁 시간이 다 되어 내려가 세탁기에 돌렸던 옷들을 꺼내자, 온통 하얀 휴지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 열불이 펄펄 끓는 것 같았다. 앞에서 사용한 누군가가 휴지를 함께 넣고 돌린 것 같았다. 로비에 항의를 하러 내려가자, 호스트와 스태프를 비롯한 사람들이 즐거운 저녁 식사를 보내고 있었다. 행복한 표정인 그들 앞에 죽상으로 선 채 세탁비를 돌려받았다. 숙소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채 방으로 돌아가는 내 뒤통수 뒤로, 불청객 컨슈머의 등장으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재생되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폭주족의 배기음 소리가 창문을 연신 두들겨대고 있었다. 이어 플러그를 두 귀에 꽂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빨리 이 숙소를 탈출해서 교토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블로그에서도 더 많은 사진과 함께 일본 종주기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ywhfrv/223298641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