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을 바라보며 태평양을 달리다

일본종주 19일 차 : 누마즈~시마다 (93Km)

by 루로우

어제 하코네를 악전고투로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자 새벽 5시였다. 개인실이더라도 넷카페는 기본적으로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보다가 결국 2시간 이후인 아침 7시에 나왔다.


아침 7시부터 넷카페에서 무료로 토스트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5시에 나갔더라면 토스트를 못 먹었을 텐데, 늦게 나왔다가 이게 무슨 행운인지. 무려 식빵을 네 개나 먹었다. 사실 토스트가 맛있어서 행복하다기보다도 편의점에서 사 먹을 아침밥 비용이 굳어서 행복했다.


이곳 누마즈라는 도시는, 사실 소위 ‘오타쿠’라고 하면 항상 언급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러브라이브’의 배경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서 있는 버스에도, 역 간판에도 형형색색의 머리 색깔을 한 애니메이션의 여자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광경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산업의 힘인가.


나는 실소 정도로 끝났지만 러브라이브 팬들이라면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까, 하고 잠시나마 팬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니메이션 속 세계를 등교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전혀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지만.

러브라이브의 도시 누마즈



이윽고 바닷가 쪽으로 자전거를 몰고 갔다. 이즈 반도를 뒤로 드넓게 펼쳐진 태평양을 둘러서, 끝이 없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제방길이 이어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솔개 울음소리가 파란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만한 낭만적인 라이딩이 있을까. 등교 중인 일본 학생들은 전혀 나처럼 낭만 따위는 느끼고 있지 않은 듯해 보였다. 매일 일상처럼 지겹게 이 길을 등교할 테니까.

중간에 공사 중인 진입금지 구간이 있어 도심 쪽으로 빠지기도 했지만, 제방길은 거의 20킬로 이상 후지 시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쯤 되자 ‘왜 이렇게 길을 길게 만들어 두었지?’라는 의구심이 슬슬 생겨날 즈음 어느 순간 ‘아!’ 하고 깨달았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징을 잘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지진해일 때문에 태평양을 따라 만들어 둔 제방이었던 것이다.


후지 시에 도착하자 도시 이름 그대로 정말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 후지산만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제발 구름아 지나가라… 30분 라이딩 뒤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바람대로 후지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지산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웅장함’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후지산을 뒤로 멀어질 때에도, 자꾸만 보고 싶어 몇 번씩이나 가다가 멈춰 서서 자전거를 세우고는 돌아보곤 했다.



막상 시즈오카라는 큰 도시에 도착했지만 생각해 둔 들를 곳이나 찾아갈 곳이 마땅히 없어서 그냥 통과하기로 했다. 시즈오카의 어느 골목길을 지날 즈음, 한 차량이 갑자기 내 앞에서 멈춰 서더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거기, 너! 일본 일주 중이야?”라고 물었다. 그는 “이거, 선물이야. 힘내.”라고 하며 메론빵을 건네고는 사라졌다. 근데 굉장히 눅눅해 보이는 게 유통기한은 지나지 않았지만, 차에서 한 5일은 묵은 것 같은 빵이었다. 아마도 본인이 먹지 않는 빵을 짬처리 당한 것 같다.

시즈오카의 연안 쪽으로 나가자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검은 모래사장과 방파제, 쭉 뚫린 드라이브 길… 이 아름다운 광경을 두고서도 ‘오늘 하마마쓰까지 달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진 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남서쪽으로 향하는 길에 정확히 남서풍이 불고 있었다. 바람도 바람이지만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어제 높은 산을 올라서 체력이 방전된 탓인 걸까? 어제 넷카페에서 4시간밖에 자지 못한 탓일까? 아마 모두 다 원인이겠지. 격렬하게 여기서 그냥 라이딩을 멈추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결국 오늘도 어제처럼 목적지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최대한 빠르게 숙소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중간에 사 먹은 것이라곤 맥도날드 버거와 시즈오카의 명물이라는 와사비 아이스크림. 뭔가 조합이 괴랄하지만, 은근히 짭조름한 와사비 향이 나쁘지 않고 달달한 아이스크림과 잘 어울렸다.




시마다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돈을 아끼려고 어제처럼 넷카페를 찾았다. 하지만 오후 4시 즈음 일찍 라이딩을 끝내려고 하자, 넷카페가 시간제로 운영된다는 점 때문에 체크인을 하기가 꺼려졌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자니 땀에 절은 채로 카페에 앉아있기도 고역이었다.


홧김에 6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4,500엔 정도의 호텔을 예약했다. 생각보다 호텔치고 비싼 편도 아니었는데, 왜 그때는 비싸다고만 생각했을까? 돌이켜보면 고작 1,500엔 차이였지만 그 금액을 아끼려고 넷카페에 가려 했던 나 자신이 가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예약하자마자 30분 후 호텔에 도착했다. ‘하타고 인 시즈오카’라는 호텔이었는데,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한 리뷰에서 ‘일본에서 이 가격 중 최고의 호텔이었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실제로 와보니 리뷰를 남겨준 그에게 감사할 정도였다. 로비가 정말 넓고 깨끗했으며, 방 컨디션도 새로 지은 건물처럼 산뜻했다. 작지만 뜨거운 탕에서 피로를 녹일 수 있는 공용 온천탕도 있었다.


샤워 후 바로 옆에 있던 마트로 향했다. 저녁으로 미친 듯이 먹고 싶은 음식을 쓸어 담았는데, 세일 품목 위주였는데도 3,000엔이 넘게 나왔다. 음식점보다 마트에서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어쨌든 오늘 저녁은 참치 타다끼와 방어회, 그리고 야키토리, 그리고 내일 아침은 장어덮밥! 로비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400엔 정도로 사 왔던 홋카이도 멜론은 하코다테에서 먹었던 유바리 멜론보다 훨씬 양도 많고 맛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로비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다른 일본인 가족들, 혹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로비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거나 비치되어 있던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카운터 쪽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바로 한국말이었다. 뒤돌아 보니 단체 관광객인 듯 한 50~60대의 한국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가이드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여 방 배정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즈오카 여행을 온 사람들 같았다. 얼마 후 한국인 관광객들이 와서는 마트에서 바리바리 봉지에 담아 온 맥주와 안주를 테이블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맥주캔 따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술판이 벌어졌다. 왁자지껄 술김과 함께 커진 한국인들의 언성이 로비에 울려 퍼졌다. 시끄러워서 눈살을 찌푸려질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자 함께 앉아있던 만화책을 읽던 일본인 가족들도, 외국인 관광객들도 모두 자리를 뜨고 사라졌다. 호텔 측에서 제지하는 것도 아니라서 할 말은 없었지만, 나도 결국 소음을 이기지 못하고 태블릿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자기엔 항상 아쉬운 호텔 숙박. 아까 사 왔던 100엔짜리 레몬 사와를 홀짝홀짝 마시며 잠시나마 나만의 호캉스를 만끽했다. 하지만 창문 바깥에는 밖에 태풍이 왔나 싶을 정도로 호텔 주변의 나무들이 신나게 헤드뱅잉을 하며 춤추고 있었다. 내일 예보에도 바람이 강하다고 하는데 걱정이었다. 내일은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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