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로우 Mar 25. 2024

후지산을 지나서

일본종주 19일차 : 누마즈~시마다

  아무리 개인실이라고 하더라도 넷카페에서 자게 되면, 잠자리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보니 다음 날 알람 없이도 일찍 눈을 뜨게 된다. 어제 800m 산을 넘는 라이딩을 했는데도 눈 떠보니 새벽 5시였다. 대충 세면 후 짐을 챙겨서 체크아웃을 하러 나왔는데, 넷카페에서 무료로 토스트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식빵을 네 개나 먹었다. 토스트가 맛있다기보다도 편의점에서 사 먹을 아침 비용이 굳어서 기분이 좋았다. 



다행히 오늘도 건물 밖에 세워둔 자전거는 밤늦도록 무사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일본에 오면 아무 데나 자전거를 세우면 안 된다고 해서 주차할 곳이 걱정이었는데, 워낙 생활 자전거 문화가 퍼져 있는 나라다 보니 어딜 가든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누마즈라는 도시는, 사실 소위 ‘오타쿠’ 하면 항상 언급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러브라이브’의 도시라는 것 말고 들어본 게 없었다(정확히는 ‘러브라이브 선샤인’의 배경이라고).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냐고? 맹세코 러브라이브를 본 적도 없다. 아무튼, 잠시나마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진귀한 광경을 보러 누마즈 역 쪽으로 갔다. 서 있는 버스에도, 심지어 역에도 형형색색의 머리 색깔을 한 러브라이브의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역시 러브라이브의 도시가 맞군… 

러브라이브의 도시 누마즈

러브라이브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실소 정도로 끝났지만 러브라이브 팬들이라면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까, 하고 잠시나마 러브라이브 팬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작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처럼 현생을 살고 있는 누마즈에서 등교 중이던 여학생들은 전혀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지만.


태평양 쪽으로 자전거를 몰고 가자, 바닷가를 둘러서 끝없이 긴 제방길이 이어졌다. 바람은 다소 거셌지만, 한국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솔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일본 하늘을 바라보며 달리니 이만한 낭만적인 라이딩이 없었다. 주민 분들도 아침 일찍 산책을 나와 걸어 다니고 있었고, 나 말고 자전거를 탄 사람은 모두 등교하는 일본 고교생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나처럼 낭만 따위는 느끼고 있지 않은 듯해 보였다. 뭐, 매일 이 길을 일상보다 지겹게 등교할 텐데.

저 멀리 가는 방향의 반대로 지나쳐 온 이즈 반도가 보였다. 이즈 반도도 정말 가고 싶었지만, 외지다 보니 값싼 숙소도 찾기 어려워 보였고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그냥 패스하고 하코네를 넘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다음에는 꼭 가야지. 물론 자전거로 말고 렌터카로...


중간중간에 공사하는 구간이 있어 도심 쪽으로 빠지기도 했지만, 태평양 제방길은 거의 20km 이상 후지시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쯤 되자 이렇게 길을 왜 길게 만들어 두었지,라는 의구심이 슬슬 생겨날 즈음 어느 순간 아! 하고 깨닫게 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징을 잘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지진해일 때문에 만들어 둔 것이었다.



후지시에 도착하자 도시 이름 그대로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 다른 하늘은 맑은데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후지산이 보이지 않았다. 제발, 구름 좀 걷어 주세요… 30분 라이딩 뒤에 내 바람대로 구름은 사라져 있었고 웅장한 후지산의 모습이 우뚝 솟아 있었다.


후지산을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웅장함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올린 사진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웅장함이 있다. 이미 후지시를 지날 때 후지산은 내 뒤편에 있었는데, 자꾸만 보고 싶어서 몇 번씩이나 가다가도 멈춰서 자전거를 세우고는 후지산을 돌아보곤 했다. 


과연 어느 미디어에서도 항상 등장하고,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신칸센을 탄 스즈메가 왜 후지산을 지나갈 때 자기를 안 깨워 줬냐고 화를 냈는지, 왜 일본의 민화 우키요에에 항상 그려질 만했는지 알 만 했다. 내가 이번 종주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있더라면 후지산을 바라보며 캠핑할 수 있는 가와구치 쪽이 아니라 하코네 쪽으로 코스를 잡았던 것...



어느새 이미 내 위치는 시즈오카 현이었고, 유이라는 오래된 마을을 지나갈 때였다. 점심으로 이곳의 명물이라는 ‘사쿠라에비(벚꽃새우)’를 먹으러 가게를 찾아갔다. 금토일만 영업한다는 이곳에 딱 금요일에 왔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며, 오늘도 행운에 감사드렸다. 항구는 에메랄드 빛과 함께 윤슬로 반짝이고 있었고, 이를 바라보며 먹는 새우덮밥의 맛. 사실 내 다음으로 왔던 사람들이 덮밥뿐만 아니라 새우튀김을 모두 주문하길래, 나도 추가로 튀김을 주문했는데, 새우덮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튀김밀가루 맛이 아닌, 정말 최소한의 밀가루만을 이용해 새우를 튀겨낸 듯 한 이 맛. 


유이에서 먹었던 벚꽃새우덮밥과 벚꽃새우튀김


라이딩을 하는 길에는 곳곳에 ‘Pacific Cycling Road(NATIONAL CYCLE ROUTE)’라고 쓰인 간판 혹은 바닥에 그려진 이정표가 보였는데, 검색해 보니 일본이 공식적으로 라이딩 코스로 지정한 길이었다. 한국에도 국토종주길이 있듯이, 일본에는 ‘NATIONAL CYCLE ROUTE’가 총 6군데가 있었다. 아, 이 사실을 홋카이도에서부터 알았더라면 홋카이도의 토카푸치 코스부터 밟아 왔을 텐데. 결국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추가되어 버리고 말았다.



막상 시즈오카라는 큰 도시에 도착했지만 생각해 둔 들를 곳이나 찾아갈 곳이 마땅히 없어서 그냥 통과하기로 했다. 시즈오카의 어느 골목길을 지날 즈음, 한 차량이 갑자기 내 앞에서 멈춰 서더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거기, 너! 일본 일주 중이야?”라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거, 선물이야.”라고 하며 내게 메론빵을 건넸다. 누군가에게 종주 응원과 함께 선물을 받는 것은 처음이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근데 굉장히 눅눅해 보이는 게 유통기한은 지나지 않았지만, 차에서 한 5일은 묵은 것 같은 빵이었다. 본인이 먹지 않아서 준 것이 아닐까… 아마도 본인이 먹지 않는 빵을 짬처리 당한 것 같다.


시즈오카의 연안 쪽으로 나가자,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검은 모래사장과 방파제, 쭉 뚫린 드라이브 길… 이 아름다운 광경을 두고서도 


‘오늘 하마마쓰까지 달릴 수 있을까?’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바람도 정확히 남서풍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긴 했어도 뭔가 정신적으로 오는 타격이 다른 때보다 큰 느낌이었다. 어제 높은 산을 올라서 체력이 방전된 탓인 걸까? 어제 넷카페에서 4시간밖에 자지 못한 탓일까? 원인을 구분할 게 아니라 모든 원인이 합쳐져서 그런 것이었다. 격렬하게 여기서 그냥 라이딩을 멈추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결국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최대한 빠르게 숙소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중간에 사 먹은 것이라곤 맥도날드 버거 세트와 시즈오카의 명물이라는 와사비 아이스크림. 뭔가 괴랄하지만 와사비 과자를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은근히 와사비 향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맥도날드 화장실에서


시마다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시마다와 하마마쓰 사이에는 산지가 있어서 라이딩이 쉽지 않겠구나, 하고 여기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돈을 아끼려고 넷카페를 찾아갔다. 하지만 오후 4시 즈음 일찍 라이딩을 끝내려고 하자, 넷카페가 시간제로 운영된다는 점 때문에 일찍 체크인을 하기가 꺼려졌다. 그렇다고 카페라던지 가서 시간을 때우자니 이렇게 땀에 절은 채로 카페에 앉아있기도 고역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불편한 넷카페에 자는 것도 너무 싫었다. 


나는 홧김에 6km 정도 떨어져 있는 4500엔 정도의 호텔을 예약했다. 워낙 작은 도시다 보니 호텔도 생각보다 비싼 편도 아니었는데, 왜 그때는 비싸다고 생각했을까. 돌이켜보면 고작 1500엔 차이인데 그 금액을 아끼고자 넷카페에 잘까 했던 나 자신이 가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예약하자마자 30분 후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하타고 인 시즈오카>라는 호텔이었는데, 로비도 정말 세련되었었다. 로비에는 엄청난 양의 일본 만화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내가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한 리뷰에서 ‘일본에서 이 정도 가격 중 최고의 호텔이었다’라는 말에 냉큼 예약했는데, 리뷰를 남겨주신 그분에게 감사할 정도로 나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방도 새로 지은 건물처럼 정말 깨끗했다. 작지만 몸을 담글 수 있는 공용 온천탕도 있었다. 



그래도 오늘 호텔에 왔으니, 세탁비라도 몇 백 엔 아끼기 위해 직접 방에서 운동복을 빨고 널었다. 게다가 호텔 옆에 바로 대형 마트가 있어서 너무 좋았다. 미친 듯이 먹고 싶은 것들을 세일 품목 위주로 주워 담다 보니 3422엔이 나왔다. 돈 아끼려고 편의점이나 음식점 대신 마트를 가는 건데 마트에서 돈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오늘 저녁은 참치타다끼와 방어회, 그리고 야키토리, 그리고 내일 아침은 장어덮밥이다! 호텔 로비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400엔 정도로 사 왔던 홋카이도 멜론은 하코다테에서 먹었던 유바리 멜론보다 훨씬 양도 많고 맛있었다. 역시 다시 이야기하지만 마트가 최고다.



밥을 먹던 도중 로비 카운터 쪽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말이었다. 뒤돌아 보니 단체 관광객인 듯 한 50-60대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시마다라는 도시에 대체 왜 한국인들이 관광을 온 건가 하고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관광지가 있는 것일까? 


저녁을 먹은 뒤 나는 로비에 그대로 앉은 채 일본 종주기 글을 쓰고 있었다. 다른 일본 가족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거나, 로비에 비치되어 있던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 후 한국인 관광객들이 나와 같은 마트에 다녀왔는지 바리바리 비닐봉지에 온갖 음식들을 사 와서는, 로비의 긴 테이블에 착석해 맥주캔을 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술판이 벌어졌다.


왁자지껄 술김과 함께 커진 한국인들의 언성이 로비 전체를 가득 메웠다. 시끄러워서 눈살을 찌푸려질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와 함께 앉아있던 만화책을 읽던 일본인 가족들도, 외국인 관광객들도 모두 얼마 안 되어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호텔 측에서 제지하는 것도 아니기에 할 말은 없었다만… 나도 결국 태블릿을 들고 호텔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TV를 켜니 일본 음악 방송에서 두 가수가 요네즈 켄시의 ‘Lemon’을 부르고 있었다. 꽤 오래전에 발매되었을 텐데, 한국 노래방이 아닌 일본 현지에서도 아직도 저 노래가 나오는구나. 자기 전까지 남은 호텔방에서의 숙박의 행복을 만끽하며 아까 사 왔던 100엔짜리 레몬사와를 홀짝홀짝 마셨다. 내일 예보에도 바람이 강하다고 하는데 걱정이었다. 내일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블로그에서도 사진으로 된 종주기를 읽으실 수 있어요!


https://blog.naver.com/ywhfrv/223290387265


이전 23화 지옥의 하코네 오르막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