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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달려야 할 시마나미 해도

일본종주 27일 차 : 시마나미 해도(141Km)

by 루로우

드디어 길고 길었던 지긋지긋한 혼슈 라이딩을 끝내고 시코쿠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혼슈에서 시코쿠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유일하게 넘어갈 수 있는 코스가 존재한다. 바로 '시마나미 해도(시마나미 카이도, しまなみ海道)'라고도 불리는 세토 내해 코스이다. 세토 바다 위 총 6개의 섬을 연결하는 7개의 다리를 자전거로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니, 출발 전부터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설렜다.


자전거에는 아직도 무거운 캠핑 장비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비와호에서 벌벌 추위에 떨며 캠핑을 하고 나자 이제는 더 이상 캠핑을 하고 싶지 않았다. 캠핑이 아니라 노숙, 고문이었다. 숙박비 몇천 엔을 아끼자고 가을 환절기에 캠핑을 하는 대가는 정말 가혹했다.


내가 홋카이도에서 여정을 시작했던 이유는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반대로 따뜻한 남쪽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밟아도, 하루에 160킬로를 타고 내려가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속도는 날씨가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앞으로 지나갈 예정인 모든 지역의 날씨 예보를 검색해도 밤이 되면 10도 이하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이 캠핑 짐들을 도대체 어디에 버려야 하지? 호텔 방에 전부 놓아두고 나올까라는 못된 마음이 나를 유혹했지만, 오른쪽 팔에 태극기를 달고 절대 ‘어글리 코리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거절당할 것을 각오한 채 호텔 로비에 성큼성큼 걸어가 최대한 정중하게,


“저, 혹시… 제가 큰 쓰레기를 버리고 싶은데 제가 한국인이라, 일본에서는 도대체 어디에 쓰레기를 버려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주변에 쓰레기를 버릴 곳이 있나요?”


“어… 혹시 무슨 쓰레기이신가요?”


“텐트랑 침낭이요.”


로비에 있던 여성 직원은 내 말을 듣자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텐트를 버리기 어려워서 당황했다기보다는, 난생 텐트를 버려달라는 사람은 처음 봐서 그런 듯했다. 가장 ‘숙박’이라는 행위에 있어 호텔과 대척점에 있는, 캠핑 도구인 텐트를 호텔에서 버리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상황도 코미디였다.


“음… 일단 가져와 보시겠어요?”


괜히 묶어둔 짐을 풀었다가 거절당하면 다시 묶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몇 번씩이나 “부피가 꽤 커요. 정말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제가….”라고 직원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직원이 괜찮다고 하자, 옅은 걱정과 함께 각종 에어매트, 침낭, 텐트를 몽땅 가득 안고서 엉거주춤대며 가져왔다.


“어… 음… 저희가 처리해 드릴게요. 그냥 여기다 두시고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건네고 싶다. 후쿠야마에 여행을 갈 일이 있다면 이 글을 읽는다면 꼭 ‘후쿠야마 오리엔탈 호텔’에서 묵기를.

달려있던 프론트백들을 떼어낸 것만으로도 자전거는 마치 다이어트를 한 것처럼 엄청나게 날씬해졌다. 자전거가 이렇게 날렵한 물건이었었나? 탑승감도 확실히 가볍고 경쾌해졌다. 이전까지의 라이딩이 내게는 모래 주머니 훈련이 된 셈이었다.



세토 내해 코스로 넘어가는 첫 다리까지는 20킬로라 1시간 정도면 금방 도착하는 거리였다. 표지판에 히로시마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히로시마도 가보고 싶었지만, 히로시마 쪽으로 계속 라이딩하게 된다면 시코쿠를 갈 수가 없다. 아쉽지만 히로시마는 다음에 오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렴풋이 현수교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토 내해로 진입하는 첫 관문인 오노미치 다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실 그때까지 눈치채고 있지 못했던 것은… 결국 다리를 타기 위해서는 다리로 올라가는 오르막을 올라야만 했다. 그것도 7개의 다리를 건너야 하므로, 7개의 오르막을 올라가야 한다. 다리 아래를 통과할 때부터 머리 위로 붕 떠 있는 다리를 바라보며 ‘하… 이걸 7개나?’라는 생각이 한숨과 함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빙글빙글 경사진 다리 위로 향하는 오르막을 올랐다. 기어를 낮추고 페달을 꾹꾹 두 발바닥으로 눌렀다. 다리 위로 올라가자, 구름 한 점 없는 최고의 날씨에 넓고 청량한 다도해가 윤슬과 함께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많은 해안가 라이딩을 했지만, 이렇게 다리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달리자 또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첫 번째 섬으로 내려와 도로 위 파란 선을 따라서 움직였다. 이곳도 비와호와 함께 일본의 ‘National Cycle Route’로 지정된 코스이다. 그래서 그런지 쫄쫄이를 입고 본격적인 소위 ‘자덕’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특히나 외국인도 정말 많았다.


섬 자체에는 딱히 별 게 없었다. 그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시골 풍경이었다. 하지만 바다 근처에는 어딜 가나 자전거들이 몇 대 멈춰 서 있고, 사람들이 눈부신 바다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모습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선 채 미어캣처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물론 나도 동료 미어캣처럼 멈춰 서서 그러곤 했다.


두 번째 현수교 위에 도착. 막상 두 개의 다리를 오르고 보니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몇 번씩이나 쉬거나 헉헉대며 올라갔겠지만 이제 한 번에 쉬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종주동안에 체력과 실력이 그만큼 올라간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다리… 지금이 몇 번째 다리인지도 까먹을 만큼 다리와 섬을 지났다. 섬을 라이딩하는 것은 지루했지만 항상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세토 내해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지막 다리인 쿠루시마해협대교를 건너 드디어 시코쿠에 도착했다. 가장 일본스럽다고 할 혼슈와, 천혜의 자연을 만난 홋카이도의 이국적 풍경을 모두 맛보고 왔던 나는 ‘시코쿠에는 어떤 또 다른 시코쿠스러운 풍경이 펼쳐질까’ 하고 기대를 잔뜩 안고 다다랐다.


하지만 시코쿠의 풍경은 정말 그냥 혼슈에서 수많이 지나쳐 왔던 많은 시골 마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홋카이도가 유독 특이한 케이스가 아닐까. 어쨌든 시코쿠에 대한 내 마음은 30분 만에 촛불처럼 꺼져버렸다. 그저 오늘의 목표 지점이었던 마츠야마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열심히 페달을 밟을 뿐이었다.



소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마츠야마는 높은 빌딩들이 많은 꽤나 큰 도시였다. 저녁 6시 즈음 도착하자 퇴근하는 직장인과 하교하는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마츠야마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숙소는 도고 온천 근처였는데, 도고 온천은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장소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거대한 온천이 이 장소를 모티브로 했다고 해서 유명한 곳이다.


도고 온천은 현재 공사 중이라 반쯤 커다란 구조물로 의해 덮여 있고 전면만 개방되어 있었다. 공사 중이긴 하지만 온천은 계속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체크인 후 가보기로 했다. 그래피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듯한 도고 온천을 덮은 구조물만 보면 꼭 거대한 미술관처럼 보였다. 금액은 500엔. ‘엄청 유명한데 가격은 저렴하네?’라는 생각과 함께, 낡은 내부 복도를 지나 남탕 로비에 들어갔다. 비와호에서 갔던 동네 목욕탕처럼 정말 작았다. 아니, 명색이 도고 온천인데 이렇게 목욕탕이 작다고? 이건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목욕탕보다 작잖아? 공사를 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도고 온천이 실제로 정말 이렇게 작은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와 달리 큰 실망과 함께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사실 알아보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마츠야마의 도고 온천 마을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도고 온천 주변에 실제 운행되었었다는 봇짱(도련님) 열차와 봇짱 시계탑을 비롯해, 다양한 도련님 굿즈도 팔고 있다. 사람들이 열차 앞에서 돌아가면서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가벼운 가을 밤바람을 맞으며, 도고 온천 주변을 산보하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시코쿠 서쪽 끝인 야와타하마까지는 70킬로라 내일 잘만 하면 배를 타고 큐슈의 벳푸로 건너갈 수 있었다. 큐슈에서는 2~3일 정도면 최남단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지긋지긋한 페달질도 이제 끝이 보인다. 기나긴 여정의 끝자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밤이었다.





마츠야마의 도고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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