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들을 잊은 후에 찾아오는 것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 마시면서 시작하는 아침부터 업무 이후 저녁 산책까지 대체적으로 루틴이 잘 형성된 나의 하루가 무너진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출장과 격무로 그 탓을 돌리며 다소 불규칙적인 생활에 힘겨워하던 최근, 모처럼 접어둔 일들로 하루를 채워보기로 했다. 우선 물 한 잔은 커녕 바로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정신과 의사가 쓴 마음에 관한 책으로 내용도 훌륭하고 무게가 가벼우니 더 맘에 들었다. 저자와 친구 사이이며, 내 상황이나 정서를 잘 아는 친한 동생이 그 책을 읽다가 ‘언니 생각이 났다’며 선물해준 책이다. 한 때는 책이 위안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집 근처 대형서점을 찾아 책으로 현실을 잊으려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현실이 나아지니 책도 멀어진건가? 바빴다는 핑계인건가? 연유가 어떻든 늦은 아침 침대위에서의 독서는 정신없던 며칠에 대한 보상같았고 책은 내가 닿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해결점을 제시하는 산뜻함을 전해줬다. 점심 식사는 따뜻한 밥을 지어 몇 가지 되지 않는 찬으로 부모님과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었다.부모님과 식사를 한지도 꽤 되었고, 바빠진 동생이 모처럼 시간을 내어 방문한 것도 오랜만이다. 식사 후 선생님 놀이에 푹 빠진 조카를 위해 흔쾌히 학생이 되어 놀아주다보니 우리 조카 못 본 사이 많이 컸다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관심을 쏟지 못해도 모든 것들은 순리대로 변해가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면서 말이다. 저녁을 먹은 이후 산책을 나섰다. 연이은 야근과 약속들로 밤시간에 한가로운 산책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숲길을 걸으며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과 나의 마음에 대해서 돌아봤다. 산책을 나서면 버릇처럼 머리를 채웠던 내가 뱉은 언어들, 사람들과의 관계, 내 십년 후의 모습과 같은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마지막 산책은 더위 뒤 끝과 선선한 바람이 맞물려 있던 시점이었으니 이 또한 꽤 오랜전 일이다.
십수년 전도 아닌데 오랜만이란 말로 별 유난인가 싶다. 두어 달을 건너 뛰고 다시 만난 그 일들이 더욱 오래된 것처럼 느끼는 것은 늘 해왔던 일이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기에 그렇다. 늘 가까이에 있고, 늘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을 잠시 잊고 있었고, 또 그것들이 얼마나 나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주는지를 느끼게 해준 오늘에 감사한다. 망각하고 있었던 소중한 사람이나 가치들도 점검해봤다.가끔씩 접어둔 일을 꺼내 보면 그때의 열정이나 애정, 초심을 만나게 되고 그것들은 나태한 생활에 다시 고삐를 매주는 역할을 한다. 길진 않지만!
근간에 못 했던 일들을 해보는 것으로 채운 오늘 마지막 나의 일은 침대에 누워 오래전 감동깊게 본 영화 한 편 감상하는 것으로 맺을 것이다. 분명 그때와는 다른 느낌일텐데 어떤 느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