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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Aug 31. 2021

부질없어하는 것도 부질없다.

덧없음조차 덧없다.



나는 소위 '중2병'이라고 하는 사춘기를 꽤 빡세게 맞았다. 잊고 살다가 불현듯 그 당시가 떠오르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최근 오랜만에 부모님과 옛날 옛적 사진 및 기록들을 찾아본 일이 있다. 그중에는 20년이 훨씬 넘은 나의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도 가득했다. 그런데 중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이렇게 적어두신 것이 아닌가. 


"창 밖을 보고 생각에 빠져있는 일이 많음."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당시의 나는 '중2병 말기'였다는 걸 인정한다. 한 동안 불알친구들과 놀아도 재미가 없었고, 그 좋아하던 레고나 과학상자에도 더는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저 이상한 공상들에만 사로잡혀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항아는 아니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도 전혀 없었다. 


뭐랄까. 

다만 그저 모든 것이 무료하게 느껴졌을 뿐. 


그런데 나에게 온 이 '중2병'의 유형은 쉽사리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20대에 대학을 거쳐 군입대를 하고 나서도, 직장에 다니면서 온갖 사람들의 추악한 면을 보고 나서도, 나는 그냥 모든 것이 더욱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찰나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은 나를 더 허무하게 할 뿐이었다. 마음속에 가졌던 이상이나 목표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사회에 내던져지자, 그저 모두 다 한낮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중년의 문턱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에 다다라서야, 이런 것들이 조금이나마 고쳐지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고쳐진다기보다 더욱 심화(?)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부질없어하는 것도 부질없다.

말 그대로다. 


그동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덧없고, 부질없다 생각하던 것들만 늘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그 모든 것에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부질없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염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마냥 찬란하게 보는 편도 아니었다. 첫 사회생활이었던 기업 인턴 시절에서도- 국회나 오래 몸담았던 방송국에서도- 기타 모든 곳에서 가졌던 기대감에, 배움보다는 실망하던 순간이 많아서였을까. 어느 순간 덧없어 보이는 것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30대 중반에 들어서고부터는, 나 스스로 어딘가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아마 내심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삶의 목표든, 연인이든, 보물처럼 아끼던 소중한 소장품 따위든, 당장 다음 달의 휴가 계획이든, 그 어떤 것에 대한 '미련'이든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래서 오늘에 조금 더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됐다. 어떤 것도 맘대로 굴러가지 않고, 또한 컨트롤조차 할 수 없다면, 그저 나는 지금 잠깐 머무는 시간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되려 요즘 같아서는 아주 마음이 편하다. 어떤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어도 '이럴 일이었나 보다'하고 넘어가게 된다. 


과거 일련의 사건을 겪을 때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런 젠장!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는 생각들이 휘몰아쳤었다면,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부질없음을 조금 깨닫게 된 것 같다. 




뭐랄까.


시간은 강물 같다. 그리고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그저 흐르는 물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다. 이따금 거세게 몰아치는 물줄기는 흘러가는 과거에 묻어보내고, 새로 다가오는 시간이나 잘 맞이해야지 싶다.


잡히지 않는 물줄기 몇 ml를 두 손에 담아봐야 얼마나 더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어차피 미세한 손 틈으로 새어나갈 게 뻔한데. 


혹여 그릇이라도 하나 가져와서 저 물줄기의 한 움큼을 담아낸다 한들 그건 또 무슨 의미일까. 

겨우 퍼낸 물줄기에 어떤 것이 뒤엉켜 담겨있을 줄 알고. 


크디큰 대야에 받아낸 과거는, 내 현재의 두 팔만 무겁게 할 뿐이다. 

그러다 지쳐 쓰러지면 나는 이 물줄기에 휩싸여 과거 속으로 떠밀려 가겠지. 


이런 생각들 역시 「현재 강물 위의 나」가 겪는 모종의 중2병일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한들 뭐 어때~? 그게 지금 내 옆을 스쳐가는 물줄기겠거니 하는 거지.

흐르는 과거는 결국 어디론가 사라지기 마련이니, 계속 몰아치는 물줄기나 굳건히 맞아야겠다. 

그냥 그렇게 지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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