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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Sep 06. 2021

나는 왜 비주류를 외면하는가

'비주류'의 유행도 결국은 한 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실 난 주류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 내가 주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됐든 '과거의 나'는 비주류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철부지였고 지금은 아니다. 아주 철저하게는 아니더라도 '비주류'를 외면하려 꽤 노력하고 있다. 이 '노력'이라는 단어에서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나는 '주류'가 썩 편치는 않은 사람이다. 성향도 그렇다. 어디 저만치 뒤편이나 조용한 곳을 매우 좋아한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만의 시간이 오롯이 필요하다. 혹은 정말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몽상은 나의 취미이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뻘스러운 상상 속에 빠지는 일이 참 즐겁다.


그런 내게, 주어진 시간 중 대부분을 주류 속에 파묻혀 지내야 하는 일상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주류 속에 있고, 앞으로도 주류 속에 있어볼 작정이다. 이 주류 한복판에 있다 보면, 이따금 반항적 기질이 마음속에 꿈틀거린다. 그러나 인내력도 시간이 갈수록 느는 것 같다. 많이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가 임원 직함이 내 이름 앞에 붙은 뒤부터였을까. 그 후부터 수많은 권한과 함께 그 못지않은 제약과 억제가 몰려왔다. 배부른 소리인 것도 맞다. 남들이 꽤 탐을 내는 자리이고, 부러워하는 기회들이 즐비하다면 그것은 희소한 혜택임에 분명하니까. 저마다 각자의 고충이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누리는 작금의 것들이,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란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주류였던 나는 어떻게 주류가 되었나. 대학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나 동기, 선후배들 모두 최근까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다. 글쎄. 나는 주류가 되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한 철 유행의 흐름에 운 좋게 얻어걸린 것 같다. 왜, 문화적인 현상을 봐도 이따금 비주류였던 것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가 있지 않나? 패션이든, 음악이든 말이다.


물론 그 비주류의 과정 속에서 나의 노력이 전무했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겸손이라기보다 위선에 가까우니까. 누차 얘기하듯, 시기적으로 모든 것들이 부합했을 거라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과거부터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 취향이 현시대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먹혀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내가 고집하던 비주류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쌓아 올린 나의 것들은, 당장 내일부터라도 세상에서 외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주류적 사고와 일처리 방식으로 올라온 위치, 그리고 내 주변으로 모인 수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을 더 이상 한 철의 유행이나 무언가에 가려진 들러리로 만들 수는 없다.




말하자면 책임감이다.


그것 때문에 과거로부터 이어진 나의 과거 생활양식과 생각 따위를 최근에서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참 기구하다. '하고 싶은 것'과 '본인의 재능'이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취미 하나씩은 가지려고 하나보다. 일터에서 발현할 수 없는 자신의 취향을 어딘가에 마구 쏟아내고 싶은 것은 아닌지... 내 일터의 미국인 오너들 역시, 나에게서 무언가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위치에 나를 앉혔겠지.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그 모든 책임과 과제들은 분명 나의 취향 밖의 일인 것도 사실이다. 결국 내가 좋아서 시작(선택)한 일이므로 이것을 탓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그건 너무 이기적이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스친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에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봤다. 발라드 가수가 되고 싶지만, 랩에만 재능을 보여 결국 래퍼가 된 아이돌. PD를 꿈꿨지만, 매번 고배를 마시며 결국은 스탭으로라도 방송국에 입사한 후배. 심지어 언론인을 꿈꾸고 있는 지인 한 명은 근 7년째 낙방을 거듭하면서 결국 다른 회사에 근무 중이다.


죽을 때까지 한 길만 고수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 그리고 '각자의 그것'이 그 모든 시간에 부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제와 내일의 차이는 극명하다. 오늘의 주류가 내일, 아니 지금 당장 비주류가 될 수도 있다. 시간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남몰래 비주류 속에 살고 있다.


이따금 갖게 되는 달콤한 휴일에 나는 여전히 몽상을 즐긴다. 굳이 불편한 카세트 테이프나 LP를 켜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파묻혀 시간을 마구마구 날려버린다.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상상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다. 이것이 근래 나의 휴식이다. 과거에는 나와 비슷한 비주류의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거나, 술자리를 갖는 것도 큰 위안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부터는 많은 것에 제약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의 휴식만 갖게 됐다.


또한, 나는 비주류인 사람들에게 여전히 큰 애착을 갖고 있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관계들은 여전히 나와 매우 끈끈한 유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오래된 관계를 배제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새로 만나는 이들 중에서도 여전히 나의 이목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비주류인 사람들이다.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똘끼는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 가끔 피곤할 때도 있긴 하다(어쩌면 주류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그러나 여전히 나는 비주류의 모든 것들에 크게 관심을 갖고, 그런 자들에게 늘 마음을 빼앗긴다. 예측할 수 없는 변동성이 왜인지 나를 흥분시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은 비주류이기에 배척되거나 소외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눈에 띄기도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분명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러니 최근의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 내가 그러했듯, 저들에게도 시간에 부합될 만한 '때'가 온다면, 그들에게 모종의 기회를 줄 수 있는, 혹은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한 번 되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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