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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Jan 14. 2021

'아픈 날의 기억'을 추억하는 변태

나는 지금 부상을 입고 누워있다. 하여 오늘도 병원에 들렀다. 교수님은 요즘 시기가 시기인 만큼 웬만하면 입원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 이유로 집에서 요양 중이다. 갑작스럽게 다친 바람에 끙끙거리며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붙어있다.


그러다 불현듯 지금까지의 '아팠던 날들'이 기억났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다. 상처 혹은 병 등의 이유로 신체가 아팠을 때 말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히쭉거리는 내 스스로를 보고, 문득 '나 변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이게 무슨 아련하고 분위기 있게 떠올리는 마음의 상처 따위도 아니고... 




나는 때때로 내 몸의 흉터를 보며 즐거워한다.


으레 남자아이들이 그러하듯 과거의 나는 참 많이도 다쳤다. 7즈음이었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가 잔뜩 찢어진 적이 있다. 어둑해지는 저녁시간에 나가다 봉변을 당했다. 굳이 밤에 출동을 감행한 이유는 확실히 기억난다.


첫눈이 왔기 때문이다.


아래층에 사는 성민이가 눈을 보러 가자고 집에 전화를 해왔다. '눈이 온다!'고 소리치며 바로 뛰쳐나가려는 나를 부모님이 붙잡았다. 워낙 신난 내 표정 탓이었는지, 어머니는 잠깐만 보고 빨리 오라 말씀하시며 두꺼운 패딩을 입혀주셨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사고가 난 것이다. 당시 우리는 계단 난간 위로 올라가서, 엎드린 채 쭉~ 미끄러져 내려오는 행위를 자주 했다. 신나는 마음 감출 길이 없어 그날도 그랬다. 한층 한층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결국 성민이네 집에 도착하기도 전, 나는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눈썹 위로 살이 쭉 찢어져 뜨거운 피가 철철 흘렀다. 얼굴을 뒤덮붉은 액체가 느껴지자 깜짝 놀라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신나게(?) 울기 시작했다. 아파트 통로가 요동치는 순간 동네 이웃 분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나오셨다. 당연히 그중에 우리 부모님도 있었다.


피가 옷을 적시기도 전 반팔 차림의 부모님이 쿵! 쿵! 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뛰어왔다. 계단 몇 칸을 건너뛰며 내려오시던 모습이 선명하다. 그 모습을 보고 왜인지 더 서럽게 울어댔기 때문이다.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새도 없이 부모님은 곧바로 나를 낚아채 병원으로 뛰었다.

반팔 차림으로, 첫눈을 맞으며.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릴 수 없어 무작정 뛰던 아버지의 넓었던 등짝, 옆을 보니 내 등에 손을 얹고 같이 뛰어오는 어머니 표정이 머리에 남았다. 응급실에서 상처들을 꿰매고 난 뒤 잠들기 전 했던 약속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유행하던 로봇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부모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찍은 뒤에야 나는 꿈나라로 갔다.


상처들은 지금도 이마와 뒤통수에 흉이져 남아있다.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피식거리는 이유다. 그래도 나는 웃음이 난다.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던 그때의 기억. 그것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다. 겨울날 반팔 차림의 그 모습들이 왜 이렇게 따듯한지 모르겠다. 셋이 세 개의 새끼손가락을 같이 걸던 기억도….

그래서 오늘 역시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다가 나는 피식거린다.



볼거리의 추억


국민학교 시절에는 '볼거리(유행성이하선염)'란 병에 걸린 적이 있다. 보통 어린이들이 앓는 이 병은 요즘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나 그때 우리 시절에는 더러 발생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통증이 엄청 밀려오는 것이다. 얼굴은 터질 듯 땡땡 붓기 시작했다. 온갖 곳이 다 아팠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짐을 쌌다. 점차 심해지는 통증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앉아있는데 계단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출근 때의 복장 그대로 숨이차게 뛰어오는 어머니였다. 역시나 그 모습을 보니 서러움이 더 복받쳐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곧바로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은 뒤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잠시 나를 눕힌 어머니는 동네 슈퍼에서 내가 좋아하는 간식들을 잔뜩 사 오셨다.


이불을 덮고 수건을 댄 채 누워있는데 어머니가 옆에 앉아 '빠다코코넛'을 까주시던 장면. 진짜 내가 엄청 좋아하는 추억이다. 어머니가 잔소리 하나 안 하시고 직접 과자를 까주시다니! 회사에 안 가시고 이 시간에 같이 집에 있다니! 진짜 좋았다. 그게 너무 행복했어서 잊혀지지 않는다.


몇 시간 뒤 동생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우리 둘에게 여러 당부를 하시며 다시 회사로 가셨다.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느껴지는게 있다. 당시의 시대 속에서 나로 인해 겪었을 '직장인 어머니'의 고충이다. 그게 나 역시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더욱 크게 후벼 파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찾아온 손님들


아무튼 며칠을 앓아누우며, 나는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여러 묘안을 찾아냈다. 그중 하나는 만화영화였다. 그렇게 토요일 오전, 집에서 녹화해둔 '배추도사 무도사'를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물어보기도 전에 나는 문밖의 무리들이 누군지 알아챘다. 10살 내외의 아이들은 두세 명만 모여도 시끌시끌하다. 그런데 반 전체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몰려들었으니 오죽할까. 주 6일제였던 그때, 토요일은 오전 11시면 모든 수업이 끝났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다 같이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문을 열자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던 범수와 세영이, 아라가 보였다. 이 셋을 중심으로 반 아이들이 비좁은 통로 위아래층 전체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 괜찮아!?",  "언제 낫는 거야!?",  "학교에 언제 올 거야!? 빨리 놀자!"라는 말을 하면서 꽉 껴안아주던 그 아이들의 체온이 아직도 느껴진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다가 요즘엔 가끔 찡해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는 나는, 곧 중년이다. 큽...


이때의 기억이 유난스럽게 더 생생히 떠오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아이들이 가져온 편지 뭉치 때문이다. 그때 범수의 한 손에는 실내화 가방이, 다른 한 손에는 검은색 비딜 봉지가 있었다. 그곳에는 반 아이들 45명이 써 내려간 이야기보따리가 가득했다.


'세영이가 시험에서 글쎄 0점을 받았다'는 내용, '아라네 동생과 함께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 본 이야기', '호준이가 수업시간에 방귀를 뀐 내용' 등 내가 없는 동안의 사건사고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는 한 20p는 되는 것 같이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삐뚤빼뚤 편지지의 라인도 전부 무시됐다. 그러나 그 조그만 아이들이 적어 내려 간 커다란 글자. 그 글자들이 가득한 까만색 봉지. 내게는 그 '이야기봉다리'가 '은비 까비'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사실 난 그 시절부터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요즘도 종종 만나는 저 친구들에게, 아직까지 이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는 비밀을 밝힌 적이 없다. 언젠가 빅 이벤트처럼 한 번에 팍! 꺼내볼 작정이었다. 나이 때문인지, 시기가 그러한 건지, 유독 근래 모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곧 이것들을 녀석들에게 보여줘 볼 작정이다. 

그때 못했던 답장을 이제야 한다.


불현듯 끙끙거리며 침대 위 뒤척이다가, 그 옛날 아팠던 기억들에 묻혀 잠시 행복한 여행을 했다. 아무래도 나는 행복한 변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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