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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Jan 11. 2021

'30대'에 잃어버린 것 중 가장 아쉬운 건 바로…

'중년'의 문턱에서 발견한 것



20대가 끝나고 난 뒤. 더 구체적으로는 '30대 중반 즈음'에 체감되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잃어가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둘-내 곁을 떠나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이런 '상실감'마저 '상실'된다. 


건강이 예전과 다르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나둘 멀어지는 친구들에게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이제 더 이상 유년시절의 우리는 없다. 각자 사회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또 다른 자아를 만들었기 때문에. 


현실을 뛰어넘고자 가졌던 '이상'이나 '패기'도 마찬가지다. 책임져야 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낸 댓가다. 가정이건, 회사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


면죄부

사실 사라지는 수많은 것들 중 내가 가장 서글프게 느꼈던 것은 '면죄부'다. 보통 '유아'나 '어린이'는 나이를 비롯하여 그들의 지능과 발달 수준 등이 늘 참작된다. 그렇기에 '어른'은 설사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쉽게 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이르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해주는 역할에 더 충실하다. 이 어린 친구들에게 무조건적인 엄포와 강력한 처벌을 내릴 수는 없다. 분명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미숙하니까. 

미숙한 우리보다 훨씬 더.


그런데 참 고맙게도 이 '면죄부'는 20대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아마도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처음인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도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면하게 되는 수많은 과제들이 넘쳐나니까. 하여 태어나 처음 뛰어드는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범위 내에서 '젊은이'들의 실수와 패기를 용납해주곤 한다.


'아직 초보니까', '인턴이니까', '학생이라 당연히 모를 수 있지' 등의 이야기들은 한 동안 참 편리한 방어막이 되어준다. 그렇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이러니하게 '학생' 딱지를 붙일 수 있다. 다소 미완성처럼 보이는 이 단어도 몇 년씩이나 우리를 보호해주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20대~30대 초반에는 '사회초년생' 내지 '직딩'이라는 말로도 불리는 것 같다. '직딩'이라는 말은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한다면 매우 어색할 것이 자명하다. 


나 역시 미숙한 상태로 나간 사회에서 여러 스승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받아들인(수용한)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성인 이전과는 또 다른 내 자아를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10~20년에 걸쳐서야 비로소 그 자아도 얼추 제 모습을 갖췄다. 이제 더 이상의 '면죄부'나 '배려' 따위는 존재치 않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내가 당면한 모든 것들이 이제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된다.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평가한다. '매일의 과업' 속에서 위아래로 점수가 매겨지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니 '사회초년생'이던 그 시절에 못다 한 도전들이 종종 떠오른다. 진한 아쉬움이 남은 것이다. 


면죄부를 대신해 갖게 된 것, 책임감

그 좋은 명분이었던 '젊은 시절의 면죄부'는 영영 떠났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맞교환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책임감' 같다. 하나둘 나이가 차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도전하기 어려운 때'라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헌데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전하기 어려운 때'가 된 것이 아니라 '도전하기 어려운 책임감'을 갖게 된 것 아닐까?


누군가는 가정을 꾸려 아내와 자식이 생겼다. 또 어떤 이는 팀장으로 진급해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늘었다. 가장의 경우 가족들을 위해 도전적인 선택을 진중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의 과업이 '가정의 원활한 운영'을 당락 짓는 가장 큰 요인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팀장들도 마찬가지다. 팀원들은 꽤 많은 것들을 제안하고, 부서 내에서도 프로젝트를 수시로 내려보내지만 섣불리 선택할 수 없다. 하나의 과업이 팀원 전체의 분위기와 향후 미래를 결정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통의 경우라 생각한다. 가정 및 직장에서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독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것에는 분명 모종의 이기심이 녹아있을 것이다. 이상만 좇고 가능성이 점쳐지지 않는 도박만으로 큰 결정을 할 수 없다.


중년 이후의 삶도 '처음'인데, 왜 그들에게 '초보' 수식어는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나의 생을 살면서 우리 모두가 마지막까지 줄곧 '처음'만 겪어보다가 죽는다. 태어나는 것도 처음, 학교를 다니는 것도 처음, 사회생활도 처음, 부모가 되는 것도 처음, 모든 것이 다 첫 경험이다. 더 나아가 죽는 것도 생애 딱 한번뿐이지 두 번 세 번 태어나고 죽을 수는 없다.


그런데 유독 중년 이후부터는 그들을 수식하는 단어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것을 통달한 나이라는 '불혹'같은 게 그나마 있을 뿐이다. '초보'나 '처음'과 같이 방어막이 되어줄 단어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 내에서 '아들'이나 '딸'보다는 '어머니'나 '아버지'같은 단어에 어마어마한 책임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직장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부여되는 직급 역시 마찬가지다. '인턴'보다는 '대리'에게, '대리'보다는 '팀장'에게, '팀장'보다는 '사장'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기 마련이다. 


왜일까.


그것은 '보다 더 미숙한 이들'을 이끄는데서 얻는 '성취의 가치'이려나.

생각해보니 미숙한 그 수많은 생들에 대한 배려, 그것 역시 우리 모두에게는 처음인 것이다. 

'나보다 미숙한 이들을 위해 양보하는 법', 그것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래, 사실 처음엔 '면죄부'를 잃어 참 아쉬웠다. 그걸 잃고 나서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책임감…. 그것들이 어깨 위에 늘어날 때면 너무너무 부담스럽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책임감' 말고도 다른 걸 더 발견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양보한 면죄부로 인하여 조금 더 수월하게 뒤를 쫓아오는 아직 미숙한 친구들. 


그 친구들로부터 '면죄부'의 댓가로 모종의 뿌듯함, 그리고 보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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