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한국의 성지순례 ②] 경기 용인_손골 성지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 437번 길 67
- 연락처 : 031-263-1242
- 주차 가능(주차 편리한 편, 다만 성당 미사 시간을 전후해서는 매우 혼잡하다.)
* 미사 시간 : 주일(오후 2시) / 화-토(오전 11시)
- 대중교통 불가
★ 방문을 위한 간단 정보
- 고양이들의 천국 같다. 입구부터 성지 곳곳에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매우 친근하게 다가온다. 위치는 수원시 동북쪽과 용인시의 서쪽에 걸쳐있는 '광교산' 내에 위치해있다. 대중교통으로는 매우 가기 어려운 산 중턱에 위치해있어 자차로 이동해야 한다. 인근에 외곽에서 유명한 카페들이 즐비해있어, 방문 전/후로 들르면 좋다.
손골 성지는 유난히 고양이에 대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아마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수많은 종류의 고양이들이 먼저 다가와 그르렁 거리며 다리에 비비적대기 시작했던 것. 이윽고 성지 곳곳에 고양이들을 위한 간이집들과 음식이 가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고양이들을 챙기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도착하자마자 고양이들과 긴 시간을 보냈다. 수십 분을 소요하고 나서야, 다시 재정비를 하고 다시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곳에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오는 것은 결코 추천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성지가 산 깊숙이 위치해 있는 데다, 길목도 구불구불 영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손골 성지는 박해 시대 때 지방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기해박해(1839)' 전후로 서울 가까이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던 곳이다. 그렇다 보니 누구나 오가기 편하고 눈에 띄는 곳은 당연히 피했을 게다.
다른 성지들도 그러하듯 손골 성지 역시 천천히 걸어보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다른 곳들과의 차이라면 조금 더 동산 같은 느낌이었다는 점. 산 중턱의 위치에서 성당과 기념관 같은 건물들 주변으로 산책로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고, 표지판과 같은 안내 역시 상세하고 보기 편하게 자리해있었다.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따라오는 고양이들과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손골 교우촌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 기록이 명확하진 않다. 다만, 한 편지 덕분에 유추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문헌 상 처음으로 언급되었던 때가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M.A.N. Davely, 1818-1866) 신부님이 부모님께 보낸 서한이었다. 1853년 9월 18일, 그가 보낸 편지의 발신지가 바로 이 손골이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입국한 선교사들은 손골에서 신자들과 함께 숨어 살며, 언어와 풍습을 익히고 선교활동을 준비했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손골에 머물던 도리(H.P. Dorie, 1836-1866) 신부와 경기남부지역의 선교 책임자였던 오메트르(P. Aumaltre, 1837-1866) 신부 등 수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하게 된다. 이때 신부들은 물론 수많은 신자들도 함께 체포되어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중 손골에 머물던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삼대(三代)의 순교자들이었다. 이 손골에 살다가 1871년 5월 서울 좌포청에서 이 요한,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가 함께 체포되어 포졸들에 의해 처형된 것이다. 이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묘를 손골로 옮겨 모신 것이 위 가운데 사진의 무명 순교자 묘이다.
손골 성지를 둘러보다 보니 '교우촌' 역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장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된 박해로 인해 당시의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나머지 고향과 살던 곳을 뒤로하고 이런 교우촌을 형성해 촌락을 이루며 살아왔다. 그 시대에 고향과 본인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서만 형성된 교우촌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오갔다. 당시의 핍박 속에서, 그들을 이토록 갈망하게 한 요인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내가 평소 갈원 하던 것들에는 이토록 가혹한 박해가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