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게 정말 무슨 129(일이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신입 카피라이터로 첫 출근을 하자마자
“정카피! 이거 카피 빨리 써봐!”
짙은 짱구 눈썹에 딱 짱구 같이 막무가내인 사장의 고함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디자인 시안 몇 장이 쏟아진다. 디자인 실장이 급하게 그것이 무슨 광고이고, 어떤 특징을 부각시켜 나온 디자인 시안인지를 속사포로 설명하며 당일 오후에 바로 광고주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니, 점심 먹기 전까지 헤드카피가 나와야 한단다. 아, 정신이 까마득해진다. 카피라이터로 출근한 첫 날부터 갑자기 카피부터 써 내라니, 어떤 카피를 써야 하나? 눈앞이 깜깜해 진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광고였다. 새로운 기술개발로 엘리베이터 기계구조가 바뀌면서 별도의 기계실 공간이 필요 없어졌다는 게 핵심이었다. 건물 옥상에 기계실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게 되면서 건물은 한 층의 공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 이건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표현해야 했다.
첫 번째 디자인 시안은 도시 전체가 거꾸로 뒤집어져 모든 건물 옥상에 툭 튀어나와 있는 엘리베이터 기계실이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두 번째 디자인 시안은 모나리자의 머리 위에 혹이 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디자인 시안은 빌딩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디자인 시안은 저마다 느낌이 다르다. 첫 번째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도시의 개혁을 표현하는 듯 하고, 모나리자는 유머러스하면서 참신하고 인상적이다. 마지막 시안은 한껏 멋을 낸 세련된 도시느낌이다. 엘리베이터란 제품의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이처럼 저마다 다른 느낌의 디자인 이미지가 기획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저마다의 느낌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그러면서 제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특징이 명확하도록 카피 한 줄을 넣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카피! 그 카피 빨리 나와야 된다.”
사장이자 이 작은 회사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맡고 있는 짱구눈썹이 시시각각 내 숨통을 조인다.
-한 층 높아진 기술력, 한 층 높아진 공간 활용
-하늘은 매끄러운 빌딩을 좋아한다!
-혹 달린 건물은 가라!
-도시의 뚜껑이 열린다.
-도시의 구조조정
-하늘을 꿈꾸는 엘리베이터
-도시가 한 층 더 높아집니다.
-나의 이마가 하늘과 맞닿는다.
-나의 종착역, 하늘 끝
-도시가 말끔해진다.
-하늘이 사랑하는 빌딩, 하늘을 사랑하는 엘리베이터!
-하늘이 더 시원해진다!
제품의 특징에 맞춰 뽑은 디자인 시안에 집중하며 미친 듯이 카피를 써내려갔다. 심하게 비약되어 도대체 어떤 제품을 표현하는 지 알 수 없는 카피부터, 너무도 직접적인 설명형 카피까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쳐내야 할지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가고, 식은땀이 등을 쉴 새 없이 타고 내린다. 그토록 시간의 압박에 쫓기며 어떤 일을 수행하는 건 진짜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내 카피가 나오길 주시하고 있었다.
“더 생각해 봐!”
“이것 좀 더 발전시켜 봐!”
“이것밖에 안 나와?”
안 그래도 정신없는 내게 짱구눈썹 사장은 수차례 채찍질을 해댄다. 아프고, 따갑고, 무섭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힘들다. 마치 내가 행주가 된 것 같다. 사장이 나를 손에 쥐고 꼭꼭 짜댄다. 정말이지 이제 짤 만큼 다 짜서 물방울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데도 더, 더, 더 하며 나를 쥐어짠다.
도시의 옥상에서 엘리베이터 기계실이 집단적으로 떨어지는 이미지에 쓴 헤드 카피는 떨어져라! 떨어져라! 였다. 다음 2안으로 모나리자 머리에 뿔이 난 이미지에 대한 헤드 카피는 ‘모나리자의 머리에 뿔났네?’였다. 마지막으로 매끈한 도시의 스카이라인 이미지에 쓴 카피는 ‘도시의 하늘까지 설계한다!’였다.
기존 디자인 시안에 최대한 맞게 쓴 나의 첫 카피였다. 그러나 광고판이 그렇듯, 나의 카피 아이데이션을 바탕으로 그 자리에서 즉각 새로운 디자인 시안이 제작되었고, 그 날 늦은 오후 최종으로 광고주에게 제안한 광고는 총 4개안이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나의 종착역, 하늘 끝.
-모나리자의 머리에 뿔났네?
-**(브랜드)가 온다, 혹 달린 건물은 가라!
9시 첫 출근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쓰기 시작한 카피를 오후 1시경 디자인팀에 넘기고, 광고시안이 완성된 건 거의 오후 5시 무렵이었으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광고가 만들어진 셈이다. 디자이너에게 카피를 넘겼다고 카피라이터의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헤드카피를 보완하는 바디카피나 꼭 기재해야 할 내용을 정리하여 스펙 카피를 작성해야 한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디자인 느낌에 따라 문장의 느낌, 어투를 바꿔 써야 하며, 각 시안의 디자인 레이아웃에 맞도록 카피의 양도 조절해야 한다. 한 마디로 광고 시안이 완성될 때까지 디자이너, AE, 카피라이터 모두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으며, 광고주와 약속한 시간까지 촌각을 다투며 광고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카피라이터가 광고의 헤드카피를 제품에 대한 자료 조사와 충분한 이해 없이 써 냈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신입 카피라이터였던 내가 첫 출근한 날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제품의 Unique Selling Proposition(USP)이 이미 도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USP도출은 모든 광고작업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상품이 갖고 있는 단 하나의 특별한 이점을 찾는다는 것이 말로는 명확하고 쉬워 보이지만 여간 복잡하고,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폭스바겐의 ‘Think Small’광고를 떠올려 보자. 폭스바겐은 광고하려는 제품에 대해 ‘작다’는 것을 가장 특별한 단 하나의 이점으로 내세웠다. 이 USP 자체가 이 광고의 혁신이다. 모두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과감하게 상품의 유일한 판매제안점으로 명시하고 광고의 컨셉, 즉 핵심 메시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카피라이터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찾아내고, 명확한 문장으로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와서 내 첫 카피를 돌이켜 본다. 옥상에 별도의 기계실 공간을 필요로 했던 기존의 엘리베이터와 비교해 기존 엘리베이터의 열등 지점을 부각하고 싶었다면, ‘왜? 모나리자 머리에 뿔이 났을까?’라는 카피는 적절하게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기존의 기계실을 없앨 수 있다는 기술의 혁신성을 부각하고 싶었다면, ‘모나리자 머리에 뿔이 있다면?’이라는 헤드카피가 더 어울릴 수 있었을 터다. 이미지를 설명하는 문구들이지만, 미묘한 방향성의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초짜 카피라이터인 내게 그 미묘한 차이가 들어올 리 만무하다. 나는 모나리자의 뿔에 갇혀 그 안에서 수도 없이 온 길을 되돌아왔다가 간 길을 다시 가며 도무지 어디를 헤메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 시간들을 버텨내는데 집중했다.
광고 이미지와 카피가 어떤 관계를 지녀야 하는지, 카피는 과연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당시 내 무의식이 내게 한 말은 딱 한가지였다. 이미지가 말하는 창의성에 기대지 말라는 것. 너는 너만의 창의적인 문구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다만,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서도 안 될 것. 왜냐하면, 광고는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메시지로 향해야 하니까. 믿을만한 가이드라인을 스스로 정하면 버티기가 수월해진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모든 일이 비슷하다. 멀리서 깜빡이는 희미한 불빛, 희미하지만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판단이 든다면 가보는 거다. 가다 보면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