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선택

끝없이 계속되는 상실의 아리아

by 청량음료


러시아에서 독박 육아를 하던 시절 나에게 위안거리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들을 다 재우고 보던 인터넷이었다. 밤마다 소리를 지르며 울어대는 완이가 또 조만간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야행성인 나는 그 달콤한 혼자만의 시간을 포기하기가 너무 어려워 빨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완이 옆에 누워 읽어대었던 인터넷 기사들은 대부분 그 당시의 시시껄렁한 가십거리들이었으나 그중에는 클래식 음악평론가인 진회숙 씨의 영화를 통해 본 클래식에 대한 칼럼들도 있었다.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클래식을 중심으로 영화의 줄거리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고 무엇보다 그 영화에서 쓰인 클래식의 의미와 역할을 설명해주는 칼럼으로, 영화도 좋아하고 클래식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칼럼이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어느 날 밤도 어김없이 인터넷을 보다 보니 그녀의 새로운 칼럼이 떴는데 ‘소피의 선택’이라는 처음 듣는 제목의 영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 칼럼을 읽고서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던지 그날 밤 잠을 설치고 몇 날 며칠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진회숙의 다른 칼럼들은 여러 번 읽기도 했으나 칼럼 리스트 중 '소피의 선택'은 눈길도 주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몇 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우리 동네의 도서관에서 ‘소피의 선택’을 발견했다. 그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칼럼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터라, 한 권으로도 꽤 두꺼운 책이 두권이나 1, 2라는 번호를 달고 나란히 꽂혀있는 것을 보고 그 분량에 놀랐다. 그리고 하계동에 사는 5년 내내 그 책은 지나가면서 눈팅만 했지 읽고 싶지도 않았고 읽을 용기도 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얼마 전 어느 날 문득 손을 뻗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한 달 가까운 시간에 걸쳐 이 책을 읽어 내려갔는데 이번 연휴에 부산에 내려가지 않아 여유가 있었던 틈을 타서 완독 할 수 있었다. 오래전 일이라 칼럼에서 나의 마음을 사무치게 아프게 했던 소피의 ‘선택’ 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 세세한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나에게, 이 책은 이제껏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슬픈 이야기로 남았다.

이 책의 배경은 1950년 대의 미국 브루클린, 미국 남부 출신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스팅고라는 22살 청년이 화자이다. 그는 하숙집 자신의 방 바로 위에 세 들어 살던 커플 네이선과 소피를 알게 되고 곧 그들과 매우 가까워진다. 특히 소피는 아름다운 폴란드 여성이었는데 스팅고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아주 사랑하게 된다. 네이선은 어느 연구소의 생물학자, 소피는 어느 병원의 접수원이라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스팅고는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는데, 알고 보니 소피는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것 아닌 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수용소의 생존자였다. 네이선과 소피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네이선이 자주 광폭해지고 소피를 의심하여 심하게 학대하는 경우가 점점 빈번해져서 결국 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알고 보니 네이선은 정신병이 심한 데다 마약까지 남용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끝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네이선이 총까지 겨누며 소피를 위협하고 스팅고와 소피의 둘 사이를 의심하자 둘은 네이선에게서 멀리 도망쳐 어느 호텔에 묵는다. 자신의 오랜 사랑을 고백하며 결혼하자는 스팅고에게 소피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준다.
소피는 일찍 결혼하여 두 아이가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로 끌려갈 때 얀과 에바 둘도 함께 간다. 포로들이 수용소의 입구에 긴 줄을 이루며 서 있는데, 그 줄은 나치 친위대의 군의관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가스실로 직행할지 아니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서서히 죽어갈지 결정되기 위함이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소피에게 그 군의관은 말한다.

“하나만 데리고 있어.”

“비테?(뭐라고요?)”

“네 아이들 중에 하나만 살려 줄 수 있다고. 다른 아이는 가야 하고. 누구를 데리고 있겠나?”
“제가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넌 유대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라며. 그래서 특별히 봐주는 거야. 하나라도 선택할 수 있게.”

“그럴 수는 없어요! 선택할 수 없어요!”

“닥쳐! 지금 당장 선택해. 안 그러면 아이들 둘 다 보내 버릴 거야. 빨리!”

“제게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선택할 수 없어요..”

“그러면 둘 다 보내 버려. 나흐링크스(왼쪽으로)!”

소피는 외친다.

“이 아이를 데려가세요! 내 딸을 데려가요!”
그렇게 에바를 가스실로 보내고 지켜낸 아들 얀 마저 어린이 수용소로 끌려가 끝내는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어찌어찌 살아남아 미국으로 흘러온 소피..

예전의 나는 걱정 근심 두려움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 병, 사고 등 안 좋은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을까 겁을 냈는데, 나의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 그런 두려움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겨 사랑하는 이들이 더 늘어나자 행복도 함께 커졌지만 또 늘어난 행복만큼 그것을 잃을 경우 생길 엄청난 상실감이 겁나기도 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다니 바보같이..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지가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진회숙 씨의 ‘소피의 선택’ 칼럼을 읽을 당시 나는 아직 걱정이 많은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 나의 아이들 중 하나만 선택하라니. 한 명만 살릴 수 있고 한 명은 죽어야 하는데 그 선택을 엄마인 내가 해야 한다니. 그 이야기를 읽었던 밤에 난 소피가 겪었던 선택을 마치 내가 해야 하는 양했고, 내가 이 이야기를 안다는 이유 만으로 나에게도 그런 끔찍한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고민으로 마음이 불에 덴 듯했다. 이제는 소중한 이들을 잃지나 않을까 미리 걱정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내게 ‘소피의 선택’을 읽을 용기도 생겼던 듯하다.

이 책은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이 스팅고의 입을 빌려 말했듯 '끝없이 계속되는 상실의 아리아'다. 소피라는 한 여인의 불행한 인생은 차치하고서라도 나치의 홀로코스트, 미국의 흑인 노예문제, 인종차별정책 등 인간의 잔악함이 어디까지인가를 궁금하게 하는 문제들을 여실히 보여주고자 한 스타이런의 의도대로 이 책은 나를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이므로, 그리고 나는 그 참혹한 시대에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피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만약 내가 그 시대를 살아내어야 했다면 난 어떤 소피의 선택들을 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 선택들은 과연 모두 떳떳한 것들이었을까. 자신할 수 없다.


소피와 네이선은 클래식 애호가들이었으므로 이 책에서는 많은 클래식이 나온다. (그래서 진회숙 씨도 이 칼럼을 쓸 수 있었겠다. 지금은 유튜브로 내가 원하는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시대이므로,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클래식 음악에 살고 싶어지기도, 그 음악을 놓쳐서 언제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죽고 싶어지기도 했던 소피의 심정에 새삼 내 주변에 흘러넘치는 음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 음악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들어보고 싶었으나 너무 책의 흐름이 끊길 것 같아 첨 들어보는 제목 한 두 가지만 들어보고 넘어갔는데, 오늘은 이 책을 읽는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네이선과 소피가 동반 자살하여 누워있던 침대 곁에 놓여있었던, 그들이 마지막까지 들었던 음반 레코드들 중 하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7번 2악장 라게르토를 몇 번이고 들어 보았다.

‘나는 소피와 함께 자주 그 음악을 들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한 팔로 두 눈을 가린 채로 그 느리고 달콤하고 비극적인 선율이 방 안을 채우는 것을 듣곤 했다. 죽기 직전에 이 곡을 썼대요. 그래서 이 음악에선 기쁨에 가까운 체념이 느껴지는 걸까요? 그녀는 이렇게 묻곤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운이 좋아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면, 제일 먼저 이 곡을 외워 그 영원의 소리의 미묘한 느낌까지 표현하려고 노력했을 거라고도 했다. 그때 나는 소피의 과거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고, 잠시 멈췄다가 덧붙이는 그녀의 말 - 그 곡을 들을 때마다 황혼 녘에 밖에서 뛰어놀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모습과, 어둠의 그림자가 고요한 잔디 위를 서서히 물들여가는 모습이 떠오른다는 말 - 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듣지 못했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했다는 소피를 보고 싶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소피를 만나봐야겠다. 그리고 그 시절 ‘구타당하고 배신당하고 학살당하고 순교당한 희생양들, 600만 명의 유대인, 200만 명의 폴란드인, 혹은 10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 500만 명의 러시아인들, 그리고 이 숫자 뒤에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소피들’을 위해 스팅고만큼 분노하고 슬퍼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이들을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 아프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외면하지 않으며, 언제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직면하여 더 배우고 알아가야겠다. 수많은 소피들이 당해야 했던 표현 할길 없는 아픔에 대해 구체적으로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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