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김수현, 전지현이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거기서 외계인 김수현이 잔잔하고 멋진 목소리로 읽어주었던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이었다. 그 당시 러시아에 있었던 나는 인터넷을 통해 그 드라마를 보았고 심하게 빠져든 나머지 그 책이 궁금해져서 가끔 받았던 국제우편으로 다른 짐과 함께 그 책을 받아 읽어 보았다. 꽤 두꺼운 책이었지만 글씨 크기가 작지 않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단순하다. 키가 1미터 가까이 되는 도자기로 만든 아주 고급스러운 토끼 인형이 바로 에드워드 툴레인인데, 그의 첫 번째 주인 애빌린은 에드워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 옷과 시계 신발로 치장을 해주고 그를 사람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 사랑을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그 자신은 애빌린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벌을 받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몇몇의 주인들을 만난다. 하지만 마침내 에드워드가 그 주인들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자 운명의 힘이 그들을 가슴 아프게 이별하도록 만들고... 그러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그 토끼 인형은 알아가게 된다.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게도 할 수 있다는 것. 이 이야기의 끝에 에드워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애빌린과 다시 만나게 된다.
애빌린과 함께 살 때의 에드워드는 자신의 겉모습에만 관심이 있는 토끼였다. 내가 어떻게 멋지게 비치고 있을까만 생각하는.. 하지만 주인들이 바뀌어가면 갈수록, 그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면 생겨날수록, 사랑으로 인해 그는 자신을 버리게 된다. 난 남자 토끼 인형이지만, 본래 이름이 에드워드이지만, 수잔나가 되고 여자 옷을 입어도, 말론이 되고 털모자에 구멍을 내어 만든 옷을 입게 되어도, 쟁글스가 되고 누더기만 걸쳐도 에드워드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사랑하는 주인이 마음 아프지 않기를, 죽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 주인인 4살짜리 꼬마 여자아이 사라 루스가 결국 폐병으로 숨을 거두자 자신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옛날에 도자기로 만들어진 토끼가 있었어요. 토끼는 한 어린 여자아이에게 사랑을 받았죠. 토끼는 바다를 여행하다가 갑판에서 바닷속으로 떨어졌고 한 어부가 구해주었죠. 그리고 쓰레기에 묻혔다가 어느 개가 꺼내 주었어요. 오랫동안 떠돌이와 여행했고, 잠깐 허수아비로도 일했어요.
옛날에 토끼가 있었어요. 토끼는 어린 여자아이를 사랑했고 그 아이가 죽어 가는 걸 지켜보았어요. 그 토끼는 멤피스 거리에서 춤을 추었어요. 그리고 어느 식당에서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지만 인형 수선공 덕분에 다시 살아났지요. 그 토끼는 다시는 사랑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옛날에 토끼가 있었어요. 토끼는 봄에 여행이 시작될 때 자기를 사랑해 주던 여자아이의 딸과 정원에서 춤을 추었어요. 아이는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토끼를 흔들었어요. 가끔은 너무 빨리 돌아서 둘 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요. 둘 다 날개가 달린 것 같았지요.
옛날에 신기하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은 토끼가 있었답니다.’
나의 큰아들 건이는 6살이 되도록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러시아에서 건이를 어딘가 기관에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던 것 같다. 그런 건이를 6살 11월에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리드 스쿨이라고 하는 사립학교 산하 유치원이었는데, 모든 선생님들과 프로그램, 식사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너무나 만족스럽게 아이를 보낼 수 있었다. 건이를 담임하게 되신 선생님의 이름은 마리야 표도로브나였다. 마리야가 이름이고 표도로브나는 부칭으로, 부칭은 아버지의 이름을 뜻하는데 이름을 굳이 해석하자면 표도르의 딸 마리야가 되겠다(러시아에서는 상대방을 높일 때 이름과 부칭을 같이 사용하는데 그래서 러시아 이름이 길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마리야 표도로브나 선생님은 우리 건이를 참 많이 사랑해 주셨다. 우리 집과 학교의 거리는 상당하였던 데다가 등원과 하원의 시간에 항상 차가 많이 막혔다. 그래서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는 남편이 건이를 데려다줘야 하는 바람에 선생님이 출근하시는 8시까지 유치원에 갔고, 자주 선생님이 퇴근하시는 저녁 8시 무렵까지 유치원에 머물다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12시간이 가까운 시간을 유치원에서 보냈지만 건이는 기특하게도 선생님과 교실 데코레이션도 하고, 친구들과 수업도, 바깥 놀이도, 체육 시간도 훌륭하게 해내었으며 심지어 러시아 식의 세 끼 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다른 한국 직원이 자신의 아이를 그 유치원에 보냈는데, 식당 아주머니께서 그 직원에게 ‘전에 한국 꼬마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밥을 참 잘 먹었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건이가 그토록 즐겁게 유치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마리아 표도로브나 선생님이 계셨다. 할머니 선생님이셨던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알고 보니 며느리가 고려인이었는데, 나와 체구도 비슷한 자그마한 여성이라고 하셨다. 손주들이 혼혈이고 반이 한국인의 피가 섞이다 보니 다른 러시아 아이들보다는 손주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이와 며느리를 닮은 듯한 나까지 많이 좋아해 주셨던 듯하다.
행복했던 건이의 러시아 유치원 생활은 아쉽게도 5개월 만에 끝이 나게 되었다. 회사에서 남편의 귀임 명령이 떨어져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건이는 5개월 만에 러시아 시를 줄줄 외우고 악센트 없이 러시아인처럼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런 면에서도 참 아쉬웠다. 무엇보다 마리야 표도로브나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 한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유치원에 가는 마지막 날, 선생님은 자신이 다른 어떤 학생보다 건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고, 6개월 혹은 1년 후에는 꼭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며 눈물로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3월 말이었지만 눈이 가득 쌓여있었던 학교 정문 앞까지 나와 인사하시던 선생님의 얼굴과 몸짓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의미 있게도 러시아어판으로 갖게 되어 참 기뻤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 책을 볼 때마다 따뜻하고 다정스러우셨던 마리아 표도로브나 선생님이 생각난다. 책의 속지에는 원래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셨다는 선생님이 직접 지으신 시가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건!
배트맨처럼, 스파이더맨처럼
용감한 사람이 되길!
누군가 갑자기 너를 화나게 해도
힘 있게 날쌔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잭 스패로처럼
명랑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되길
그럼 순식간에 널 배의 선장으로 데려갈걸!
난 네가 지루할 틈 없이
동화처럼 살아가길 바란단다
이 책을 선물로 줄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렴
많은 세월이 흘러도
나를 정답게 기억해 주길!
사랑을 담아 마리아 표도로브나 선생님이.
2015년 3월에.
이 시를 새삼스레 번역하고 보니 가슴 한편이 뭉클하고 찡해온다. 한 아이는 부모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5개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마리아 선생님의 아낌없는 애정이 건이가 잘 자라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난 믿는다. 우리 건이가 앞으로도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많이 많이 받게 되길, 또 많이 많이 주게 되길.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은 토끼 에드워드 툴레인처럼 인생의 길에서 헤매게 될 때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다시 돌아올 길을 찾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