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영원한 나의 언니

by 청량음료


우리 집 책장에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껏 항상 꽂혀있는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제인 에어'이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되어 빛바랜, 심지어 옛날 일본식으로 세로줄로 인쇄되어있는 그 책은, 이제는 겉표지의 본래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낡았지만, 내가 어디로 가든 나와 함께하고 있는 동반자와 같은 존재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는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친정아버지가 구입해 놓으신 똑같은 모양의 세로줄 세계 문학 전집, 한국 문학 전집이 책장에 죽 꽂혀 있었는데, 다른 책은 이제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제인 에어의 이야기는 나를 강하게 사로잡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고, 대학 입학으로 집을 떠날 때도, 결혼으로 완전히 집을 떠날 때도 언제나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일어서며 결국에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누구에게 기대어서도 아닌, 온전한 자신만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내는 제인 에어의 불굴의 투지를 많이 본받고 싶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 번씩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렇구나, 안됐구나 정도로 읽어 내려갔던 부분.. 외숙모에게서 쫓겨나 들어간 로우드 학교에서 만난 헬렌 버언즈와의 우정과 그녀의 너무나 이른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항상 눈물이 난다. 어린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혹독한 태도를 보며 분노가 일어나고,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히 죽어간 헬렌의 고귀한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연민으로 가슴이 저려온다.
반면 제인을 대하는 외숙모의 태도에 대해 어릴 적 나는 항상 분노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모질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은 만약 내가 숙모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나와는 성격이 너무나 다르고,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으며, 나에게 늘 적개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는, 피 섞이지 않은 조카. 애정 없는 그 아이를 죽어가는 남편의 일방적인 강요에 못 이겨 끝까지 책임지겠노라 마지못해 맹세를 하긴 했는데.. 끝까지 책임지기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싫었을까 조금은 이해가 가는 나에게 또 흠칫 놀라고 내 내면의 성숙함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나라면 제인의 숙모보단 덜 매정하게 행동했으리라 믿지만 어쨌든...
아... 그 외에도 로체스터 씨와의 사랑 이야기도, 그의 곁을 떠난 후의 삶도, 결국은 이루어진 그들의 사랑도, 결국은 이루어낸 온전한 제인 자신만의 인생도 얼마나 강력한 그 스토리의 힘으로 나를 끌어당기는지.. 제인 에어는 어떤 거대한 깨달음을 준다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견뎌 낸 힘을 가진 고전답게, 오랜 세월 나를 지켜봐 주고 또 나의 곁을 지켜주는 '언니'와 같다. 왜 친구보다 언니라고 하고 싶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이 1975년 발행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리고 제인 에어라서 '언니'같다.(단순하다ㅎㅎ) 무엇보다 제인 에어라는 한 여성의 불꽃같았던 삶이 시대를 뛰어넘어 나에게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것 같다. 삶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지 않으나 공평치 않은 자리에 주저앉아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길을 찾고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누구나가 선망하는 보기 좋은 유사 행복이 아닌, 진실한 사랑의 빛으로 가득한 삶을 택했던 제인 에어 같은 언니가 나에게 있었다면 나의 고민으로 치열했던 과거가 좀 쉬웠을까.

나에게 '제인 에어'란 중학교부터 책장에 꽂혀 있는 빛바랜 세로줄 바로 이 책이다. 오래전 번역되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도, 온통 누렇게 변하고 몇 장이 세월의 힘에 못 이겨 떨어져 버렸어도, 시중의 그 어떤 멋들어진 제본의 제인 에어라도 이미 제인 에어가 아닌 것 같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온 이 책이 부디 좀먹지 않고,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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