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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10. 2023

해 아래 새것은 없다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시작된 아이들의 겨울 방학은 어제부로 끝이 나고 오늘 개학을 맞이했다. 9월에 시작된 새 학년은 12월 크리스마스 무렵 1학기가 끝났고 3주 간의 겨울방학을 거쳐 이제 큰 아이는 7학년 2학기, 작은 아이는 5학년 2학기를 맞이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이 집에서 내복을 입고(팬티는 입지 않은 채) 뒹굴거리면서 엄마아빠의 뜨끈한 흙침대에 누워 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인 둘째 아들은 며칠 전부터 아~ 하는 탄성을 시시때때로 내질렀다. 억양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뭔가 불만이 있거나 안타까워하는 것 같다. 왜 그래? 하지만 엄마인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학교 가기 귀찮아요!


우리 아이들은 인터내셔널 스쿨에 다니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인터내셔널 스쿨은 학비가 어마어마한데, 회사의 지원이 있기에 그 비싼 학교를 보낼 수 있었고 비슷한 처지인 다른 한국인 엄마들과는 이 학교에서 우리가 제일 가난할 거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학비가 비싸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학교를 다녀야 한다 라는 말이 전혀 와닿지 않는 듯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싫고, 단체 생활이 주는 부자유도 맘에 안 들고,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도 불편하고, 숙제나 시험, 프레젠테이션 같은 것도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아이들에게 다가오는 학업과 학교 생활에 대한 부담감은 비싼 사립학교에 다니든 무료인 공립학교에 다니든 똑같을 테니 말이다.


머 어쨌든 네가 학교 가기 싫거나 말거나, 오늘부터 아들들은 학교에 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들을 깨우고, 아침을 차려주고, 도시락을 싸고, 꾸물거리는 아들들을 재촉해가며 13킬로 떨어진 학교까지 태워다 주는 모닝 루틴을 다시 시작하려니 어젯밤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내 맘이 무겁거나 말거나 새 아침은 밝았고 난 3주 만에 익숙하게 준비한 후 아이들을 병아리 몰듯 차에 태워 학교에 내려다 놓고 학교 근처에서 장을 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해의 한 주를 집에서 함께 보내면서 우리들은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왜냐하면 내가 바빴기 때문이다. 여러 육아 전문가들이 말한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엄마는 꼭 일을 해야 한다고, 아이와 너무 많은 시간 붙어 있으면 안 된다고. 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켜보고 있으면 속이 터지기 때문이다. 엄마의 모든 말은 그것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잔소리로 듣는 꼴, 그 행동은 안 했으면 한다는 말을 들으며 ‘네’라고 대답은 하는데 대답하면서 그 행동을 또 하고 있는 꼴, 코 앞에 있는 것도 찾지 못해 ‘안 보여요’를 연신 외치는 꼴, 엄마의 말이 한 귀로 들어가는데 한 귀로 그 말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보이는 꼴 등을 굳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지 않아도 너무나 잘 볼 수 있다. 자연스레 좋은 말이 진짜 잔소리가 되고, 여러 번 거부당한 듯한 좋은 말은 샤우팅으로 바뀌고, 그럼 우리 아들은 이 모든 일의 시초가 되었던 자신의 잘못은 생각나지 않고 이 일의 결말인 엄마의 샤우팅과 화난 표정만으로 감정이 상하는 루틴을 꽤 오랫동안, 그리고 작년엔 최고조로 많이 겪었더랬다. (2022년에 대한 아쉬움이 1도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아들의 사춘기 입문이었다) 7학년이 되면서(이 학교는 6학년부터 중학생) 중학교 생활에 조금 익숙해진 아들의 사춘기 증상이 조금은 나아지기도 하고, 나의 마음 내려놓음도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은 어느 정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며칠 전 아이 둘을 앉혀놓고 선언했다.

앞으로 엄마가 매우 바쁠 예정이야. 매일매일 글을 써야 해. 그리고 앞으로 한국학교에서 형아 누나들 글쓰기를 가르쳐야 하는데 엄마가 거의 책을 써야 할지도 몰라. 그래서 엄마가 너희들에게 일일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를 못해. 할 수도 없어. 알아서 잘 하자 알았지?

사실 책을 써야 하는  아니고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엄마가 큰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앞두고 있다는 것을 과장해서 알려주어야 두 아들이 좀 더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한국학교에서 3월부터 시작되는 신학기(한국학교는 학제를 한국식으로 따르고 있으므로 3월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부터 글쓰기 수업을 신설할 계획이니 내가 맡는 것이 어떻겠냐는 교장 선생님의 제안이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쉬는 황금 같은 토요일 오전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일의 유일한 단점인데 방과 후 수업까지 하게 되면 오후 시간마저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1초 망설였지만 이내 나는 교장선생님께 대답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실 독일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조금 더 하고 싶어서 여러모로 생각해 보고 추진도 조금 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잡다스런 여러 가지 이유로 뭔가를 혼자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학교는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이미 잘 짜인 공식적인 루트이고, 공식적으로 모인 아이들을 내가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는 메리트가 컸다. 거기다 프랑크푸르트 한국학교라는 이름이 나의 앞에 걸려 있으므로 내가 나의 능력을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학교 이름을 믿고 아이들을 보내주시는 학부모님들이 많으실 것이므로 아무것도 내걸만한 것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황감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오케이는 했는데 이제 어쩐다… 새로운 수업에 교장선생님께서 거는 기대가 큰 듯하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2박 3일 한글학교 교사 연수에서 대표 강사로 오셔서 만나 뵈었던 경희여중의 강용철 선생님께 연말 한국에 갔을 때 연락을 드렸다. 연수 중간, 글쓰기 수업에 쓸만한 교재와 참고 도서를 추천해 달라는 나의 요청에, 한국에 왔을 때 자신을 찾아오면 여러 조언과 함께 책들도 권해주시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믿고 진짜로 찾아갔다. EBS 중학국어 일타강사이시자 다른 방송일도 많이 하시는 너무너무 바쁘신 강 선생 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시간 쪼개어 만나주시고 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강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들을 소중히 품고 독일로 돌아왔다.


이제 재료는 얻었다. 잘 요리를 해서 학생들 앞에 떠먹을 수 있도록 차려주는 일이 남았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다. 레시피도 여기저기에 있는 것을 모아서 나와 우리 학생들의 입맛에 가장 맞게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진짜로 정말로 너무나 부담스럽다.




대학원을 다닐 때 한 선생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러시아 언어학에 대해서 배울 때였는데,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원래는 성경의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 땅에는 무엇이든 새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래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들 뿐이라는 뜻이다. 이를 러시아 언어학에도 적용하여 우리가 쓰는 말의 문법, 어휘 등은 새로 생겨난 것은 없고(컴퓨터 같이 새롭게 생겨난 물건에 대한 어휘는 제외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조상이 쓰던 언어가 내려와서 현대인들에 맞게 변형이 되어가며 세대에서 세대로 사용되는 것이다라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의 공부하였던 고대 슬라브어, 러시아어 조어론, 형태론 등 배운 내용들은 거의 다 잊어버렸으나 그 선생님의 그 말은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때때로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이 세상에 처음 발생한 완전히 새로운 일은 아니라고. 그러므로 잘 찾아보면 이미 나와 같은 문제를 겪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결한 방법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리 당황해할 필요가 없다고.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들과 부대끼는 여러 문제들을 겪는 일은 해 아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이다. 나만 당하는  같지만 그게 아니다. 태초 이후부터 같은 문제를 겪는 부모들이 무수히 있어왔고 그들이 말하는 좋은 양육의 방법들이 세상에 나와있으므로 나는 나에게 맞는 이미 있는 방법을 찾아 우리들에게 적용해 보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들들에게 조금, 아니 많이 무심해지는 것이, 그리고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좋은 양육태도일 것 같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해야 하는 글쓰기 수업도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일이다. 수없이 많은 선생님들이 해 오신 경험을 책으로, 수업으로 나누어주고 계시니 이미 있는 그 열매를 잘 골라 따먹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 생각 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좀 덜어지는 것 같다. 내가 개척자 같고, 뭔가 비장해지고, 길 없는 숲을 헤쳐나가야 할 것 같지만 정작 그 숲을 들어서 보면 이미 꽤 넓은 길이 나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이 길을 걸어가 보자. 육아의 길과 글쓰기 수업이라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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