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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11. 2023

나의 버킷리스트

2. 대형견 키우기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살다가 갔다. 개를 좋아하는 동생 때문에 엄마는 어딘가에서 강아지를 얻어오셨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는 말도 못 하게 귀여웠으나, 사실 우리 가족은 그 강아지를 잘 돌볼 여력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엄마는 출근길이 바빠 아침에 개밥을 잘 챙겨주지 못했고 가족을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우셨다. 아빠는 무관심했고 우리들은 어렸다. 지금이야 강형욱 씨 덕분에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수준 또한 많이 올라갔지만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개는 그냥 개였다. 평생 짧은 목줄에 매여서 산책 한 번 못해도, 사람 먹던 양념된 음식을 그대로 먹어도, 추운 겨울 밖에서 떨고 있어도 당연한 거였다.


귀여운 개린이 시절을 지나 어느 정도 자라 더 이상 귀엽지 않게 되자 그 아이는 자연히 마당의 대문 앞에 묶여있게 되었다. 우리들이 가끔 놀아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아롱이(우리 집 첫 개의 이름)는 겨우 밥을 얻어먹으며 마당에서 혼자 지냈다. 그러다 목줄을 풀어 준 틈을 타 동네 마실을 나간 아롱이가 어딘가에서 다쳐왔는지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다. 오랫동안 세 다리로만 생활을 하고 우연히 아픈 다리가 어딘가에 닿으면 깨갱거리던 아롱이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집의 첫 개 아롱이와 헤어졌다. 그 이후로도 엄마는 몇 번 더 강아지를 데려오셨다. 그 아이들의 운명도 아롱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롱이를 키우면서 사실 어린 내 마음이 많이 고단했던 것 같다. 뭔지 잘 몰랐으나 그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웠고 먹어야 하는 밥에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아롱이와의 기억 때문에 나는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생명은 집에 아예 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자리 잡았고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무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골든 레트리버를 보았다. 큰 덩치에 순한 얼굴에 황금빛 털에 난 반했다.  매체에서 소개되는 레트리버는 사람에게 커다란 위로와 사랑을 주는 친구였다. 안 좋은 일을 겪은 주인이 시무룩하게 앉아있자 슬그머니 다가와 위로하듯 자신의 몸을 주인의 몸에 착 가져다 대던 레트리버의 사진을 본 이후로 나에게는 꿈이 생겼다. 언젠가 골든 레트리버를 마당이 있는 집에서 키우고 싶다는 꿈.


그렇다고 내가 개라는 종 전체에 대한 애정이 생겼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거리를 오고 가는 무수히 많은 작고 귀여운 개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내 사랑은 오직 하나 골든레트리버 뿐이었다. 커다란 덩치를 내 팔에 가득 채워 안고 싶었고 슬픈 날 저 아이의 듬직한 품에서 위로받고 싶었다. 어쩌다 우연히 아주 드물게 골든레트리버를 거리에서 마주치면 난 그 아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들에게 다가가서 낯선 사람(레트리버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마당 있는 집에서 사세요?


그런 로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만큼 난 현실감각이 있으므로, 서울에서도 아파트밖에 없는 동네인 노원구 어느 동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는 아예 그런 생각을 잊으려 했다. 그러다가 독일로 왔다. 독일에 터 잡은 곳은 주변에 마트도 없는 아주 한적한 작은 동네, 1분 거리에 커다란 숲이 있는 시골 마당 있는 집이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인지 나인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강아지 얘기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현실감이 있지 않았다. 그냥 마당이 있고 맘껏 산책할 수 있는 숲이 있으니 개를 키워도 좋겠다 이 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선뜻 마음을 내지 못했던 이유는 한번 우리 집의 식구가 된 개를 그 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롱이처럼 그렇게 불행하게 보내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 집 마지막 개였던 푸들 초롱이처럼 키우기 힘들어졌다고 해서 다른 집에 보내버리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은근히 자꾸 나의 로망을 부채질했다. 우리는 젊고 마침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되니 용기를 내어보자고.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시내의 중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다. 그곳에 팸플릿이 여러 개 놓여 있어서 훑어보았는데 눈이 들어오는 전단지가 있었다. 한국의 유기견들을 독일로 입양해 주는 단체의 홍보 전단지였다. 벌써 20마리에 가까운 개들이 독일로 새 가족을 찾아왔다고 했다. 한국 강아지들이 독일로 입양을 온다고?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도 그 전단지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만약 개를 키우게 된다면 유기견 출신의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한번 알아나 보자 싶어서 전단지에 적혀있던 카톡으로 문의를 했다. 혹시 골든레트리버도 있나요?


한 달에 걸친 엄청난 고민(예전 집을 살 때보다 더 고민했다 솔직히..)과 숙고 끝에 우리는 새로운 식구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그 친구가 바로 지금 우리 집에서 2년 가까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베리안 허스키 ‘히로’이다. 처음 우리 가족이 대형견을 원한다고 했을 때 입양단체 분께서는 의구심을 가지셨다. 이제껏 독일로 입양을 간 아이들은 모두 푸들과 같은 소형견이었다고 했다. 먼 독일땅까지 대형견을 보내보신 경험이 없었던 데다 대형견을 키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나는 말했다. 사실 저는 소형견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대형견을 키우고 싶어요.


그렇게 히로가 우리 집에 왔다. 입양을 결정하고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개를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어서 걱정도 많이 했다. 남편은 어렸을 적 항상 집에 개가 많았다고는 했지만 돌봄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이었으므로 사실 본인도 개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저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이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든 끝까지 책임지리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리라,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면 히로를 위해 아파트촌이 아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리라 하는 강한 결심만 있었을 뿐이다.


히로가 우리 집에 오고 난 후 나의 세상은 넓어졌다. 사람이 아닌 또 다른 아름다운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기쁨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길거리의 다른 개나 고양이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히로와 늘 1시간 반씩 숲을 산책하느라 체력도 더 좋아졌다. 무엇보다 유기견에 대한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이전엔 전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세계였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마음대로, 쉽게,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 펫샵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살 수 있다. 그렇게 쉽게 살 수 있으므로 또 버리기도 쉽다. 심사숙고를 거치지 않은 마음은 그 애정이 쉽게 식는다. 그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이 셀 수 없다. 버려진 대부분의 많은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또 안락사로 죽어간다.


WAA(With All Animals)라는 단체를 통해 우리 가족을 만난 히로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히로는 다른 암컷 허스키와 함께 어느 아파트 옥상에서 불법으로 사육(?)되고 있었다고 했다. 전 주인은 이 두 마리를 통해 새끼를 낳아 그 가족으로 허스키 썰매단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꿈만 클 뿐 능력이 없는 전 주인은 불법으로 사육되고 있던 것이 들켜 당장 쫓겨나게 되자 히로와 그 새끼들까지 8마리나 되던 허스키를 도저히 데려다 놓을 곳이 없어 아는 사람을 여러 번 거쳐 이 단체의 대표님과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세상에서 오로지 강아지 생각만, 그들 편만 드시는 카랑카랑하신 70 연세의 할머니 대표님은 그들의 끔찍한 꼴에 기함을 하시며 다시는 찾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히로 가족을 끌어안으셨다. 중성화 수술 등 이 가족에게 들어간 돈이 어마어마했다고 했다. 그렇게 히로를 제외한 7마리는 모두 캐나다로 새 가족을 찾아 떠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형견은 국내 입양이 잘 되지 않아 주로 해외로 보내어지기 때문이었다. 히로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가지 못했던 이유는 밖에서 지낸 탓에 심장 사상충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받고 나중에 보내리라 했었는데 때마침 코로나가 터졌다고 했다. 하늘길이 막히고 히로를 캐나다까지 데려다줄 방법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대표님이 잘 아시는 어느 훈련소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을 만난 것이다.


사실 이젠 히로가 없었던 예전의 우리 가족 모습이 기억이 잘 안 난다. 히로는 상남자라 애교도 없고 대부분의 시간 자기의 자리에 드러누워있다가 우리가 다가가면 귀를 뒤에 붙이고 한쪽 다리를 슬쩍 올려주는 것이 애정 표현의 전부이다. 내가 끌어안는 것도 뽀뽀하는 것도 온 힘을 다해 참아주는 것이 보인다. 내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 그는 얼굴을 은근슬쩍 돌린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싫은가 보다. 대신 엉덩이를 가져다 댄다. 뽀뽀해 주는 법이라고는 없다. 물론 2년 넘는 시간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향한 애정 섞인 다양한 표정과 몸짓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히로에게는 예전에 내가 꿈꿨던, 내가 슬프거나 우울할 때 그것을 알아채고 슬쩍 다가와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해 주는 모습은 없다. 그래도 난 괜찮다. 히로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집안 어디에서든 내가 눈을 들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갈색 유리구슬 같은 히로의 눈을 만날 수 있다. 히로를 만나고 난 후 골든레트리버에 대한 나의 로망은 사라졌다.


WAA 단체를 통해 독일로 입양 온 개들은 이제 50마리가 훌쩍 넘어간다. 입양을 결정하고 이곳까지 데려오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하시는 훌륭하신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늘 감동을 받고 있다. 이 단체의 대표님이 특히 독일로 아이들을 보내려고 노력하시는 이유가 있다. 독일은 펫샵이 없어 개를 사고파는 것 자체가 어려워 유기견이 나오기가 어려운 구조인 데다가 어쩌다 유기견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명은 국가에서 안전하고 안락하게 죽을 때까지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손쉽게 가족이 되고 손쉽게 가족이 아니게 된다. 우리나라만큼 잘 사는 국가에서 이렇게 수많은 유기견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그래도 강형욱 훈련사님과 같은, 이효리 님과 같은, 설채현 수의사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 우리나라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히로와 지내보니 개들이라는 생명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기가 어려운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만큼 사람과 친화적이고 사람을 사랑해 준다. 반면 사람과 너무 가까워서 혼자서는 살아가기가 힘들고 그래서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한국의 모든 유기견을 내가 끌어안아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내 품에 있는 히로를 잘 돌보아 주는 것이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첫걸음일 게다. 그리고 히로 덕분에 아마도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계속 유기견들과 인연을 맺어가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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