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남에게 부탁하게 되면 생기는 일

by 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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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교사 발표를 며칠 앞두고 친구를 만나 동네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우동집이었고 가격이 싼 집이었다. 점심은 내가 살 참이었다. 나보다 먼저 기간제를 해서 경력이 어느 정도 생긴 그 친구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얻고 이것저것 물어봤으니까. 나를 도와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내가 다시 기간제를 해볼 수 있던 것도 그 친구 덕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 안 되지만 내가 점심 값을 계산할 참이었다. 거기까지 괜찮았다. 원래도 서로 주고받으며 만났을 때 음식 값을 계산하던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나 스스로 오버한다고 느꼈던 건 음식이 나왔을 때였다. 쟁반에 담긴 자루 우동과 볶음 우동. 친구가 먼저 그 쟁반을 들려고 했는데 나는 불에 댄 듯 손을 뻗어 그 쟁반을 냉큼 들었다. 이미 그 이전에 반찬이며 수저, 물까지 챙겨 식탁에 차린 것도 나였다. 식사자리에서는 숨겨진 룰이 있지 않은가. 은연중에 역할이 분담되는 미묘한 순간들. 누군가가 물을 따르면 누군가는 수저를 놓는 식의. 그런데 나는 구태여 그것을 깨버렸다. 쟁반을 옮기는 것 정도는 그 친구가 하게 두어도 될 텐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쟁반을 재빨리 들어 올리는 그 찰나에 알았다. ‘아, 내가 뭔가 이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구나’를.


명확하게 비굴한 감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에게 잘 보인다 하여 기간제에 붙는 건 아니니까. 그 친구가 사립학교 이사장의 아들이라 입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역시 기간제이기에 학교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나에 대한 좋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단지 나보다 먼저 기간제를 했고 그렇기에 경력이 있어 내가 만약 기간제가 된다면 학교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런 계산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리에 들어있었나 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은은한 저자세를 취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 친구는 충분히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처럼 으스대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걸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대강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니까.) 친구는 내가 느낀 이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꺼낸 사건의 일부분일 뿐 아무 문제없다. 그러니까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거다. 이 친구에게 좀 더 정보를 얻고 싶고 앞으로 일을 하더라도 많은 것을 부탁해야 할지 모르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거다. 겉으로는 그런 의도가 아닌 척, 평소와 다름없는 친구인 척했지만 미묘하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그걸 나는 나 스스로에게 들킨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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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도와주려는 친구의 마음이 고마우니 당연히 그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은.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친구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상황 때문에. 내가 기간제를 희망하기 전, 그러니까 디자인 일을 할 때 그 친구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이렇지는 않았다. 서로 가는 길이 달랐으니까. 누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안 되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좀 더 마음이 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를 배려하고 있고 응원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 사이 변한 건 내 상황이다.


사는 게 간절해져서 믿고 의지할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기대게 된 거다. 내가 아쉬워서. 그 친구는 늘 한결같은데 내 처지가 변해서. 그 상황이 그저 씁쓸했다. 쟁반에 담긴 음식 좀 날랐다고 이러고 있는 게 우스울 수 있지만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든 걸 어쩌겠어. 나를 남에게 부탁하면 이런 마음이 된다는 걸.


지금이야 이 정도지. 더 크고 무거운 일들을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순간에 오게 되면 어떨까. 살면서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럴 때면 나는 얼마나 더 비굴해지려나. 사는 건 이런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든 걸 어쩌겠어. 별일 없듯 우리는 우동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내 마음 구석 한 편에서는 계속 쟁반을 뺏어 들 듯 음식을 나른 내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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