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기획자 아니랄까 봐
태몽 胎夢 [명사] 아이를 밸 것이라고 알려 주는 꿈.
임신 진단 키트인가? 임신 여부를 알려주는 꿈이라니. 21세기에 예지몽 타령이 조금 우습기도 하다. 임신을 하게 되면 호르몬이나 신체적인 변화가 생기고, 수면 리듬이 불안정해져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저러나 태몽이 아무리 비과학적인 미신이라고 해도 왠지 기다려졌다. 임신 여부와 더불어 성별, 장래 운명 같은 걸 점치며 굉장한 아이가 태어나리란 기대를 갖고 싶은 것. 석가모니의 엄마도, 예수의 엄마도 태몽을 꾸지 않았던가! (신화적 인물 스토리엔 태몽이 필수?) 그러던 어느날 나 역시 태몽 비스름한 걸 꾸었다. 첫 번째 태몽은 임신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태몽’으로 추측되는 애매한 꿈이었다.
첫 번째 태몽, 바다 위의 구원자
큰 배를 타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몰려오더니 배가 고꾸라져버렸다. 엎어져 버린 배를 빠져나와 나는 유유히 헤엄을 쳐서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트를 하나 잡고 올라탔다. 보트에는 꽁지머리의 여자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보트의 선장(?)이 되었다. 꽁지머리의 여자를 태운 채 깃발까지 올려가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너무나도 여유롭게.
“진짜 현실 같았어!”
깨어나서도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며칠 후 임신 테스기에 두 줄이 뙇!!! 와우? 이게 말로만 듣던 태몽이란 걸까. 혹시 그 꽁지머리 여자가 내 딸은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두 번째 태몽, 호랑이의 등장
혼자 산 길을 걷고 있었다. 혼자였지만 무섭지 않았다. 간혹 바람에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스산하긴 했지만 딱히 무서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흐흥 어흐흐흥!” 분명 동물 다큐에서 보던 그 호랑이 울음소리였다! ‘진짜 호랑이 울음소리인가? 그렇담 나도 이제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있게 되겠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자마자 진짜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나를 덮쳤고 곧바로 꿈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남편에게 신나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호랑이 뒤에 아우라가 막! 빛이 막! 그런 건?”
정신을 차리고 호랑이 태몽 풀이를 찾아봤다.
‘리더십이 강하고 든든하며 권위 있는 삶을 사는 자손을 얻게 됩니다’
아, 왠지 2프로 부족한 느낌이다.
친정엄마가 꾼 내 태몽은 족제비였다. 처마 밑에서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족제비 한 마리를 잡으셨다고 한다. 족제비는 재능이 많고 영리한 자손을 의미한다고. 태몽 이야길 듣고 자라서인지 스스로 재능이 많은 사람이라 여기며 여러 가지 분야에 솜씨를 부리며 사는 중이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태몽 효과가 아닐까?
결국 태몽은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긍정적 기대다. 태몽에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부모의 희망사항이 투영된다. 태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부모의 신뢰와 기대가 녹아든 태몽은 아이의 의식에 스며들어 훗날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태몽에도 더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막 나가보겠다.
세 번째 태몽, (무려) 축지법을 쓰고 말까지 하는 호랑이
볕 좋은 가을날 혼자 인왕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무서운 속도로 구름이 몰려왔다. 겹겹이 쌓인 구름 사이로 한줄기 빛이 내렸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실 것 같은 주인공이 나타날듯한 분위기였다. 빛 사이로 어슴푸레한 연기가 감돌았다. “어흥!!” 집채만 한 덩치에 비단결 같은 털을 가진 호랑이 한 마리였다. 호랑이는 자기가 조금 전까지 백두산에 머물고 있었다고 했다. 무려 축지법을 쓰고 말까지 하는 호랑이였다. 눈 부신 아우라를 풍기며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그 호랑이가 무섭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녀석도 그랬는지 나에게 허리를 굽혀 주었고 나는 당당하게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그리곤 인왕산을 시속 200km 속도로 눈 깜짝할 새에 내려와 근처 푸른 집으로 들어섰다. 그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호랑이와 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푸른 집을 마음껏 누비며 착한 놈에겐 황금을, 나쁜 놈에겐 황금똥을 퍼부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쯤 호랑이는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제게 옳고 그름의 기준을 알려주는 어미가 되어 주십시오” 남편에게 프러포즈받을 때만큼 꽤 설레는 제안이었다.
“오케이,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