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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Feb 11. 2021

엄마, 나의 이름은

누구 누구의 엄마라는 호칭도 좋지만

“OO엄마! OO엄마?”


뒤통수가 간지러웠지만 설마 그게 나일 줄은 몰랐다. 두 번을 내리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아차 싶었다. 내가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다니. 이건 마치 결혼한 첫날 남친에게 여보 당신으로 호칭 공격을 당했을 때, 승진한 첫날부터 느닷없이 새로운 직급으로 불렸을 때 느껴본 민망함과 낯섦이었다. 그래도 1년 넘게 듣다 보니 이제 제법 익숙하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 가져다주는 동등함과 익명성도 괜찮은 것 같다. 이렇게 나를 부르는 대부분의 관계는 아이가 매개일 테다. 그러니 주인공인 아이가 앞서고 내가 뒤에 있어도 좋은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몇 살이든 어떤 취향이든 상관없는, 엄마들의 사회니까.


하지만 그 호칭에 가려져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염려됐다. 엄마라는 호칭, 엄마라는 역할이 싫은 건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내 안에 사는 엄마와 여자와 직업인들이 고른 비중으로 내 삶에 출현해 주길 바란다. 출휴와 육휴를 거쳐 퇴사까지 이른 지난 1년간 ‘직업인 영진 님’의 출현 빈도가 현저히 낮았던 것이 아쉬웠다. 행여나 감 떨어졌다는 소리 들을까 점점 불안해질 때쯤, 사부작사부작 취미생활과 일을 시작했다.

“영진 님! 시안 검수 모레까지 부탁드릴게요.”

 OO엄마가 아니라 영진 님이다. 똥 기저귀 교체 요청이 아니라 시안 검수 요청이다. 귓가에 들리는 영진 님이라는 말이 이토록 설렌 것은 공모전 수상자로 호명된 적 이후로 처음이다. 이름 불리며 일하는 것이 이토록 신나는 것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주 불리고 싶은 마음보다는 더 이상 이름이 불리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컸다. 그래서 서둘러 일을 시작하고 싶었나 보다.


일을 시작하며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돌도 안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걱정을 보탰다. 양가 어르신들은 “어려운 시기에는 자식 잘 키우는 게 남는 것”이라며 난색을 보이셨다. 이쯤에선 의문이 든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일도 기꺼이 포기했던 양가 어머니들에겐 무엇이 남았지? 여태껏 부모님께 밥 한 번 차려준 적 없다더니 와이프에겐 매일 아침 오색빛깔 도시락을 싸 보냈던 남편을 보면, 정말로 아들 키워봤자 말짱 헛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아이를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다들 선배 엄마로서의 경험을 무기로 한마디씩 찔러대는 것이 아프고 불편했다. 사실 제일 마음 쓰이는 건 엄마인 나인데. 실제로 밤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고 싶은거 하고 살자고 핏덩이를 남의 손에 맡겼다는 죄책감. 자는 아이 얼굴을 보니 맘이 다 짜르르했다. 하다 하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꿈, 빼앗기는 꿈까지 꾸는 폭풍의 밤이 이어졌다. 아이는 엄마의 손으로 키워야만 하는 걸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아이는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나갔다. 그러면서 폭풍은 조금 잦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OO엄마와 영진 님의 욕망은 자주 충돌한다. 일이 잘된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싶으면 어린이집 하원시간이다. 정신줄 놓고 일하다가는 ‘저 엄마는 매번 늦더라’ 어린이집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말 것이다. 아이가 아픈 날엔 초비상이다. 어린이집 출석은 둘째치고 밤낮으로 간호하느라 (주변에 도움 받을 분이 없다면) 모든 일정을 취소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픈 욕심이 앞서는 날엔 두뇌 발달과 정서에 좋다는 책과 장난감 검색의 늪에 빠져 기어코 동이 트는 걸 본 적도 있다. 물론 당일 컨디션은 꽝, 비몽사몽인 상태로 전화를 받고 문서를 정리하고 이메일을 써야했다.


OO엄마와 영진 님, 그 둘을 사이좋게 공존시키는 일은 늘 어렵다. 애초에 모든 이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욕심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OO엄마와 영진님, 두 역할이 합쳐진 ‘워킹맘’의 타이틀이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저 엄마가 되어서도 내 이름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인데. 내 이름을 지켜가며 꿈꾸고 도전하고 싶다.

아이가 더 자랐을 때 또렷하게 지켜온 엄마의 이름과 삶을 본다면, 아이도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뻐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도 나의 아들이 아니라 제 이름 석 자로 자신만의 길을 가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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