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백칠호 Feb 11. 2021

싱크대 수챗구멍을 비우며

편식하는 아이를 키우며 얻은 것

싱크대에 통째로 부어버렸다. 널브러진 밥알과 잘게 다져진 고기들이 수챗구멍으로 떼 지어 들어간다.

안녕, 밥들아. 다음번엔 꼭 맛있게 먹어줄게. 너희도 하수구보다는 사람 배 속으로 들어가는 편이 좀 더 보람차지 않겠니. 벌써 석 달째다. 아이가 먹다 만 밥들과 뜨거운 안녕을 나눈 지. 언제쯤 이 밥태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는 끼니때마다 몸치장을 했다. 국은 헤어왁스, 밥은 스킨로션이었다. 머리에 국물을 챱챱 발라 문지르고, 밥은 뿌지직 소리가 나도록 쥐었다 폈다한 뒤 손에 묻혀 비볐다. 반찬은 냄새만 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일쑤였다. 이쯤 되면 밥과 반찬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나흘 전부터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안 머거.”


먹기 싫어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말문이 트인 걸까. 14개월 아기가 또박또박 문장을 말하다니. 자기가 얼마나 먹기 싫은지 꼭 말로 전하고 싶어서, 아동 발달의 몇 단계를 건너뛴 걸까. 얼마나 먹기 싫었으면. 그래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 또래보다 작은 몸집의 아이를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럴 때는 별수 없이 찬장에서 치트키를 꺼내게 된다. 바스락거리는 봉지 소리를 듣자마자 아이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기임~ 기임~ 김! 김! 김! 김!”


김을 응원하는 건지 김을 꺼내주는 엄마를 응원하는 건지 애매하지만, 확실한 건 아이가 요즘 유일하게 먹는 것이 김이라는 사실이다. 오로지 김만이 아이의 입에 출입할 수 있는 브이아이피였다. 밥을 참새 눈물만큼 넣고 김으로 돌돌 말아주면 배 곯지 않을 정도는 먹일 수 있었다. 그나마 먹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밤잠 줄여가며 만든 반찬은 혀에 닿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엄지와 검지만으로 배송시킨 조미김을 더 좋아하니 참 서운하고 서글펐다. 하긴 나도 엄마밥보다 라면이 좋을 때가 있었다.


편식이 심한 아이를 키우면서 얻게 된 것은 인내심과 내 엄마의 마음이다. 내가 밥에 든 콩만, 김밥에 든 오이만 귀신같이 쏙쏙 골라낼 때 등짝 스메싱을 날리던 마음. 아침마다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신발에 발을 구겨 넣을 때 가방에 영양떡을 넣어주던 마음.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귀찮아 죽겠네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내게로 왔다.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으로, 엄마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지금 내가 걷고 있다.




남편과 함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최근에는 무명가수 오디션 <싱어게인>을 매주 챙겨보고 있다. 그날 밤엔 TOP 6를 가리는 중요한 무대가 방송 중이었다.


“어쩜 노래 한 곡을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끌고 가지? 편곡도 새롭다.”   

“음… 계속 저런 스타일로 불러서 오늘은 감흥이 좀 덜한데.”

“가수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지.”


우리는 최예근 님의 무대를 본 직후 각자의 감상평을 쏟아냈다. 원더걸스의 <아이러니>를 신선하게 편곡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불렀다는 것이 남편의 평, 이미 찜해둔 가수가 있기에 그녀를 조금 뻔한 스타일로 몰고 간 것이 속 좁은 나의 평이었다. 힙합과 펑키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클래식과 대중가요 위주로 선곡하는 리스너였다. 어쨌거나 우리 부부는 음악을 즐긴다. 음악 편식이 있고 취향도 다르지만 <싱어게인>을 매주 챙겨볼 정도로 음악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도 공통점이겠다.

감상평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엔딩크레딧이 올랐다. 서로 다른 관점과 취향을 공유하는 과정이 세계관을 넓혀주는 생산적인 놀이처럼 느껴져서 즐거웠다. 아마도 심사위원석에 일반인 대표 자격으로 우리를 앉혀 놨어도 어느 정도는 방송 분량을 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단, 네티즌들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편식이 심한 우리 아이도 음악을 좋아한다. 핑크퐁 체조 동요와 BTS의 최신곡을 주로 듣고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린다. 윤종신의 <좋니>를 들려준 어느 날엔 입술을 삐죽거리다 눈물을 흘리다가 짜증을 쏟아 내기도 했다. 슬픈 발라드는 싫은 모양이었다. 피아노 자장가를 들려주면 아, 이제 잘 시간이구나 깨닫고 얌전해지기도 한다. 음악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먼 미래를 그려봤다. 나와 음악 취향은 달라도 음악을 즐기는 삶을 사는 아이의 모습을. 초등학생만 되어도 즐겨 듣는 가요와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겠지. 어떤 걸그룹의 팬클럽 회장이 될 수도 있고, 윤종신 님의 디너쇼 맨 앞 자석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취향을 다져가는 아이를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음악 편식 이야기를 하다 보니 편식이야말로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표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싫어하는 것도 있다. 먹는 것이 있으면 안 먹는 것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의 편식 습관을 고친다며 싫어하는 반찬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새삼 깨닫는다. 어른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싫어하는 음식을 켁켁 거리며 먹도록 해서 어린 마음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하진 말자. 다만 안 먹는 음식은 있어도 음식을 즐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 채운 밥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함께 놓고 즐겁게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왕 편식을 할 거라면 잘 하길 바란다. 저와 다른 취향의 누군가를 만나 서로 취향의 세계를 넓혀가는 기쁨을 아는, 누군가의 취향을 존중하는 편식을 하길 바란다. 먹다 버린 밥으로 가득 찬 수챗구멍을 비우면서 엄마로서의 욕심도 비워본다.


편식이 심한, 아니 취향이 확고한 아이를 키우면서 얻게 되는 것 인내심, 내 엄마의 마음이라고 했었나. 요즘은 뾰족했던 마음이 푸근하고 둥글어지는 마법도 더해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나의 이름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