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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Mar 09. 2021

잘난 놈과 잘 사는 놈

아들에게, 삶의 반짝이는 순간을 자주 맞이하길 바라며

“잘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른 게 뭔 줄 알어?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비집고 사이에
들어가서 나 여기에 살아있으니 나 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사는 거야! 잘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건 니 할 나름이라구!”


드라마 <눈이 부시게> 대사다. 방송반 모임에 다녀와 잘난 선후배들 사이에서 기가 죽은 딸 혜자(한지민)에게 엄마(이정은)가 하는 말이다. 잘난 건 타고나야 하지만 잘 사는 건 하기 나름이란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 그래 잘난 거랑 잘 사는 건 다른 거였다. 잘난 놈이라고 꼭 잘사는 법도 없고 못난 놈이라고 못사는 법도 없으니까. 잘 사니까 잘 나보이는 경우는 제법 있겠다.


<눈이 부시게>는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던 겨울에 눈물 콧물 즙이란 즙은 다 짜면서 보았던 드라마다. 최근에 다시 보면서 인생드라마로 꼽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를 만난 후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 주인공의 삶이 눈물나게 애틋하고 공감되었다. 대사도 전보다 훨씬 아프게 박혔다. 혜자 엄마가 거칠게 쏘아대는 말 저 너머엔, 상할 대로 상해서 문드러져 버린 속이 선명하게 보였다. 본인 눈엔 차고 넘치는 딸이 이리저리 치이며 상처받는데 속상하지 않을 엄마가 어디 있을까. 이번엔 혜자 엄마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까지 느껴졌다.  


문득 나도 엄마의 속을 썪어빠지게 했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뱀살이라고 불리는 비늘증 때문에 종종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놀림당한 날이면 “날 왜 이렇게 낳았어!”라고 엄마 앞에서 악을 쓰며 눈물을 떨궜다. 과외를 받는 부잣집 친구가 나보다 좋은 성적표를 받아든 날에는 괜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이것저것 배우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안 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는 “나한테 해준 게 뭐있어” “누가 낳아달랬어” 같은 비열한 멘트를 날렸지. 날라차기를 날려도 시원찮았을 판에 엄마는 입술을 꽉 깨물고 차분히 말씀하셨다.


“조선천지제일못된년.”


그래. 나는 그때 정말 나빴다.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딸을 잘나게 낳고 싶었고, 해주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상황과, 남들과 비교하며 주눅이 든 딸의 모습에 이미 충분히 속상하셨을 텐데. 그 속상한 마음을 모른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이 마음먹은 만큼 마음 쓰는 만큼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닫고 있다.



나 역시 아들을 애초에 잘난 놈으로 태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됐으면 아들의 외모는 차은우, 아이큐는 이세돌, 유머는 유재석, 춤선은 박진영, 노래는 김필이어야 할 것이다. 태생과 기질은 신의 영역이라 딱히 손 쓸 순 없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나도 잘나지 못했는데 아이가 잘나길 원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고 생각한다. 원본이 이런데 개정판이라고 별수 있겠나 싶은 심정이랄까. 아이가 누굴 닮겠나 생각해 보면 부모밖에 없는 것이다.


남편의 어떤 DNA가 아이에게 스며들었으려나. 아이가 이 글을 읽을 때쯤엔 눈치채겠지만 남편은 학교 다닐 때 앞에서 5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키의 소유자다. 하지만 나는 남편을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엄청 크니까. 볼일 보러 갈 때마다 유튜브로 신제품 IT 기기 리뷰를 보는 전자기기 덕후기도 하다. 생각이 깊고 행동은 효율적이라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 하는 신박한 일들이 수 십 가지가 있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헐크로 변신하니 조심해야 한다.  

나는 싱겁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선물 받은 아이패드, 애플워치, 아이폰을 한 달 뒤에 개봉하는 걸로 모자라 반도 활용 못 하는 아날로그 러버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 새로운 시도를 자주 하지만 자주 잊고 새로고침하곤 한다. 궁금한 것이 많아 검색력이 좋지만 쓸데없는 검색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편이다. 너그러운 성격이라 (남들도 그래줄 것이라는 쓸데없는 망상으로) 약속시간에 잘 늦는 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아이의 원본 DNA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그런데 개정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현시점에 맞게 잘 다듬은 책이 아니겠는가. 이왕이면 꽤 잘 수정보완한 개정판이 되면 좋겠다. 이를테면 키는 작아도 장신 여성에게 당당하게 마음을 표현한다든지, 아날로그와 전자기기를 유연하게 활용하고 남에게는 물론 스스로에게도 친절하다든지. 무엇보다 깊은 생각에 뿌리를 둔 걸음을 묵직하지만 더디지 않게 내딛는 사람이면 좋겠다.

 

쓰다 보니 너무 많은 걸 바란 것 같다. 엄마 아빠가 그리 잘난 사람들은 아니란 걸 잠깐 잊었다. 우리는 ‘사’ 자가 들어가는 전문직도 안정적인 공무원도 고액 연봉의 대기업 직원도 아니고 사회적 명성도 개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순간들이 꽤 많다. 매일 새살거리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낳길 잘했다, 매일 젖병을 씻는 남편을 볼 때마다 결혼하길 잘했다, 협업이 재미있을 때마다 일하길 잘했다, 매주 내가 쓴 글에 대한 소중한 감상평을 읽으며 프로그램 신청하길 잘했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느낀다.


혹시 사춘기 시절 나처럼, 아이가 내 마음을 후벼파는 날이 온다면 이 말을 해줄 것이다.

어쩌면 <눈이 부시게> 속 혜자 엄마가 혜자에게 못했던 말일 수도 있는 대사를 빌어 미래의 아들에게 부친다.


“남들보다 잘 나게 낳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남들보다 해준 것도 없어서 미안해. 그래도 엄마 눈엔 니가 최고니까 기죽지 마. 잘 살고 못 살고의 기준은 남들이 아니라 니가 정하는 거니까 기죽을 필요 없다.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싶은 순간이 많아지면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이 조선천지제일나쁜놈아!”








엄마 경력 1년 6개월 차

책과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짬이 되었습니다

다음 달 목표는 미드 몰아보기,

그다음 달은 뭘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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