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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Mar 26. 2021

자연스럽게, 벚꽃엔딩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흘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주말 댓바람부터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절대로 전화할 리 없는 엄마였다. 불길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올해 봄엔 꼭 찾아뵈려 했는데, 아직 증손주도 못 보여드렸는데, 아빠도 아직 병원에 계신데. 이거 혹시 꿈은 아닐까? 눈을 몇 번 비비다가 정신을 챙기고 짐도 챙겼다.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는 5시간 반 동안 이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는 손녀라 꾸역꾸역 참았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건 4년 전이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동안 몸이 무겁고 장거리는 위험하다는 핑계로 한동안 할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이제 가야지 싶었을 땐 코로나 19가 세상을 덮치고 있었다. 그 사이 할머니는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셨다. 면회는 금지되었다. 코로나가 괜찮아지면 괜찮아지면 했는데, 결국 나의 남편 아들과 할머니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로 남게 되었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할머니의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가시는 길까지 외롭게 보내드리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럼에도 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할머니는 늘 편안하고 자연스러우신 분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대 여섯 살까지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후에도 방학 때마다 주말마다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그때의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선명하게 붙들어 놓고 싶은 시절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남해군 두메산골 구석에 자리 잡은 할머니 집을, 사람들은 ‘점빵’이라고 불렀다. 문방구이자 구멍가게이자 주막 같은 곳이었다. 점빵으로 들고 나는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국민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스케치북이나 캐스터네츠 같은 준비물을 바삐 챙겨주셨고, 오후엔 주머니에 쫀드기를 슬쩍하는 아이를 못 본 척 넘어가 주시기도 했다. 농번기에는 어르신들에게 막걸리와 먹을 김치도 쫑쫑 썰어 내어 주셨다. 할머니는 점빵에 오는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대하셨던 것 같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친절함. 그래서인지 점빵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국민학교 앞 점빵 주인 할머니의 전 직업은 국민학교 교사였다. 교사였던 그녀가 점빵 주인이 된 데에는 얼마나 굽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싶지마는. 그땐 너무 어렸던, 그리고 지금은 너무 늦게 찾아온 손녀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림 그리는 한량 주제에 뻑하면 군수로 출마하시겠다 큰소리만 떵떵 치던 빈수레 할아버지를 만나, 손 마를 날 눈물 마를 날 없이 어떻게든 돈을 버셔야만 했던 할머니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짐작해볼 뿐이다.


할머니의 집은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기하게도 감사하게도) 앞은 바다, 뒤는 산, 옆은 밭. 여름엔 집에서 팬티만 입고 쪼르르 달려가 바닷물 속으로 냅다 뛰어들곤 했다. 바닷물이 빠지면 조개도 캐고 낙지도 잡았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엔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살구나무 바닥에 떨어진 열매 서 너개를 주워 살살 발라 먹는 것이 여름날의 일과였다.

가을이면 동네 언니 오빠들과 개구리 잠자리 메뚜기를 잡으러 신나게 뛰어다녔다. 해 질 녘엔 살구나무 대신 이번엔 무화과나무 아래로 모였다. 달콤텁텁한 무화과의 맛이 묘하게 식욕을 돋웠던 건지 무화과를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집에 가서 또 밥을 먹었다. 뒷동산 유자나무를 보고는 귤처럼 생겼는데 사람들이 왜 귤처럼 안 까먹냐고 물었던 기억도 난다. 유자는 너무 셔서 그냥 먹진 못하고 차로 마시거나 다른 요리에 쓴다고 하셨던 할머니의 대답도.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따다 정체 모를 액세서리로 치장하고서 할머니 앞에서 이상은의 <담다디>를 부르며 개다리춤도 췄더랬다.

겨울에 눈이 오면 포대를 모아 언덕배기에서 눈썰매를 탔다. 동네 똥개들과 눈을 맞으며 함께 달리기도 했다. 그 똥개한테 한 번 물리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가스나답게 좀 얌전히 있어라” 같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 나를 그냥 지켜봐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 덕분에 사계절의 자연을 자연스럽게 만끽할 수 있었구나 싶다.

봄에는 길가로 벚꽃이 잔뜩 폈다. 흐드러진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한껏 흐드러졌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마구 흩날리는 신기한 꽃이었다. 자주 볼 수 없는 꽃이라 또 할머니한테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벚꽃이다이네. 잠깐 피는 꽃이니께 더 기를 쓰고 준비해가 예쁘게 핀다이네.”


할머니가 떠나던 날부터 남쪽나라엔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만개한 벚꽃을 한참 보는데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 품에서 꽃과 나무를 배운 덕분이려니. 온갖 나무와 꽃에 대해 물었던 손녀에게 늘 차근차근 하나씩 알려주셨던 할머니. 그녀도 손녀가 생기기 한참 전, 벚꽃처럼 예쁘게 피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또 꽃을 피우려 앙상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기를 쓰고 준비한 적도 있었겠지. 당신의 손녀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시절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하얀 마침표가 되어 흩날릴 벚꽃, 은 꼭 할머니가 남겨두고 간 선물 같았다. 내가 안고 있는 죄책감과 슬픔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으라고. 실컷 슬퍼하되 너무 오래 침잠하지는 말라고. 늘 자연의 이치를 알려주셨던 할머니셨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자연을 거스르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할머니가 계신 그곳은 부디 언제나 봄이기를, 그 봄의 한가운데에서 언제나 한껏 만개하시기를.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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