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고 싶은 엄마의 메타버스 활용기
지난주 아이의 어린이집 엄마들 카톡방이 시끌시끌했다. 한 엄마의 제주도 여행 때문이었다. 처음엔 가족여행인 줄 알았는데 아이는 친정에 맡겨두고 간다 했다. 오? 그럼 남편과 둘이 오붓하게 다녀오나 보다 했다. 아직 신혼이라는 엄마들의 환호에 그녀는 잔망스러운 햅삐 이모티콘과 함께 믿지 못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남편은 남편 친구랑 놀고 나는 친구랑 3박 4일로 제주도 가요”
뭐?!?! 다들 놀라움과 부러움과 원망스러움을 안고 남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사태를 전달했다. 남편들도 신속하게 각자의 입장을 밝혀왔다. 남의 집 남자들은 “우리 집에선 그건 죽을 때까지 불가능한 일” “날 쏘고 가라” 등의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집 남자는 다녀오라곤 했지만 일단 이번 달은 휴가가 어렵다고 은근히 선을 그었다. 얄미운 사람.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와이프 혼자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이렇게 예쁘게 한다.
나도 그녀들도 혼자 며칠의 시간을 보낼 자유가 절실했다.
일, 육아, 집안일, 일, 육아, 집안일. Ctrl+C, Ctrl+V가 반복되는 매일이다.
아예 전원을 내리고 노트북을 덮고 싶은 날도 있다. 하지만 가족이 있으니 일상의 전원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럼 Alt+Tab을 누르고 잠깐 다른 창으로 벗어나는 건?
꼭 켜놓아야 하는 창은 다른 누군가가 돌봐주면 좋겠다. 잠시 눈을 돌릴 수 있게.
이런 욕심이 들 때마다 나는, 나를 대신할 나의 분신 아바타에 접속한다.
웃기고 부끄러운 이 생각의 시작은 SM 아이돌 에스파였다.
“아바타와 함께 활동하기 때문에 저희는 사실상 8인조 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이 그룹으로 돌아왔나 이게 무슨 소린가. 에스파는 현실의 에스파와 가상의 또 다른 자아 에스파 ae가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세계관의 아이돌이다. 완전히 새롭고 혁신적인 개념의… 아무튼 그들의 데뷔곡은 무려 가상 세계와 현실세계의 싱크(sync)를 방해하는 존재 ‘블랙맘바(Black Mamba)’다. SM 아이돌들의 독특한 세계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앞서 나갈 줄은 몰랐다. SM의 도박이라는 생각도 얼핏 들긴 한다.
한낱 아줌마인 나도 메타버스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든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냉큼 국내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에서 아바타 라이프를 시작하기로 했다. 아바타 자체는 소싯적 세이클럽이 생각났지만 얼굴이나 체형 피부색 등을 훨씬 더 디테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장고 끝에 의상은 연예인들이 많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교복스러운 것으로 선택했다. 신발은 살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가 없어서 차마 못 샀던 닥터마틴스러운 워커로. 머리는 현실에선 엄두도 못 낼 핑크 컬러의 포니테일로. 스타일이 완성될수록 뿌듯함과 부끄러움이 함께 밀려왔다. 하지만 이곳에선 현실의 누구와도 친구를 맺지 않았으니 괜찮다. 아무도 모를거야 괜찮아 괜찮아.
교복차림으로 이제 어디를 가볼까. 지금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은가. 들어갈만한 맵이 없나 찾아보다가 ‘힐링 오두막’이라는 겨울 캠핑장을 발견했다. 이리저리 산책을 다니다가 얼어붙은 풀과 나무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불멍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은 요즘 같은 시국에 이국적인 분위기의 공간을 가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곳에서 셀카를 찍는 재미도 쏠쏠했다. 현실에선 펑퍼짐한 아줌마일지언정 온라인에선 흥과 끼가 많은 여고생이다! 아읔 내친김에 힙합퍼들이 자주 하던 ‘댑’ 동작으로도 한 컷 찍어봤다.
어느 정도 제페토에 익숙해졌는지 워터파크에서 신나게 슬라이드도 몇 번을 타고 면세점에서 아이쇼핑도 하고 구찌 빌라에서 커피 한잔도 했다. 세상에 아이와 남편과 함께일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여유였다.
한창 놀러다니는데 누군가가 나를 팔로우한다는 메시지가 떴다. 남편이다. 남편은 블랙맘바일까 수호천사일까. 아무튼 넥스트 레벨로 가야 하는데 블랙맘바 덕분에 마인드 컨디션이 저하되어 잠시 멈춰야 할 것 같다. 결국 그건가.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