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데 어색한 사이

<상담과 코칭이야기-관계 편>

by 다정코치

나에게는

처음 만났는데 너무 편하고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가 있고 나름 친하다고 생각해서 만나지만 뭔가 불편하고 자주 연락하고 싶지 않은 친구가 있다. 상대가 나를 되게 좋아하고 뭔가 의지한다고 느끼기에 그 마음을 무시할 수 없어 친절하게 대하지만 마음에서는 뭔가 불편함이 느껴지면서 만나기가 부담스럽고 만나자는 요청에 계속 핑계를 만들기도 한다.


비난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이 있을 거다.

이럴 때 흔히 "쟤는 사람은 좋은데.. 말이 너무 많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해서 힘들어.", "쟤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쟤를 왜 이렇게 힘들어할까?"라고 하면서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 같이 느껴져 표현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힘들어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서로 같이 좋으면 좋을 텐데 쟤는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왜 안 괜찮은지..

다양한 요인들을 살펴볼 수 있겠지만, 몇 가지 근거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서로 겉으로 말로 표현하는 수준이나 들을 수 있는 수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수준과 본인이 말하고 싶은 수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거다. 그나마 듣는 것을 좋아해서 말하는 건 안 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과 듣는 것은 힘들어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만나면 서로 기대 수준과 표현의 양이 얼추 맞는다.


그러나 반대로

둘 다 듣는 것만 좋아하는데 서로 말하지 않고 있으면 적막 속에 어색함이 감돌아 불편하고, 서로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경우 한쪽은 피곤함과 불만이 쌓여 불편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듣는 것을 좋아해도 그 양이 한도 초과면 상대가 불편해질 수 있다.


또 하나는, 표현 내용의 결의 문제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말을 주고받냐 와 별개로 말의 내용이 너무 비판적이거나 회의적, 부정적일 경우 듣고 있기가 힘들어진다. 말의 내용이라는 객관적인 정보 외에도 그 정보에 깃든 부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말을 통해 전해지고 보편적으로 정서는 전염되기 때문에 표현된 부정적 정서는 상대를 더욱 다운되게 하거나 회의적으로 만든다.


내 안에 말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도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수준을 맞춰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의 불편함을 살펴봐주는 안목도 필요할 거다. 내가 듣고만 싶고 말하기 불편해도 상대의 질문에 적절한 수준을 정하여 조금이라도 표현해 주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고 조금이라도 본인의 욕구를 상대의 수준에 맞게 균형을 이루는 관계가 가능해진다.


내 안에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해서 터질 듯이 답답해도

자칫 일방적인 폭탄이 되어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는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생각하고 먼저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자신의 내면을 좀 더 살펴보고 좌절된 욕구와 감정들을 인식함으로 한 박자 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도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강해서 상대가 (나에 대한 비난이 아님에도)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낼 때 엄청난 불편함을 느낀다. 나름 이상적인 것을 바라는 욕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럴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의 불편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적절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 상대방의 부정적인 말이 마치 공격이라도 되는 양 나도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비난하는 말투가 되기 십상이다.


이럴 때에는,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어. 그럼 그걸 다르게 생각한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 사람의 그런 말에서 너는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걸까? 네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이런 질문들로

상대의 시선을 자신에게도 돌려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추스를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비난하는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보아야 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일단 본인이 받는 영향을 어떻게 이해하고 처리하는가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쏟아내는 입장을 많이 취하는 경우도

위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먼저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노력이 도움이 된다.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요즘은 서로 불편하면 웬만하면 말하지 않고 조용히 손절하는 문화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손절은 무관심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무관심이 존중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를 해치고 생명의 위협을 주는 존재는 손절할 수 있지만,

조금 불편하다고 무조건 손절하는 것이 맞을까 싶다. 대부분 깊은 친밀감을 누리는 관계에는 항상 위기가 있었고 그 위기를 잘 극복해서 오히려 더 깊은 친밀감과 신뢰 있는 관계가 된다. 그것은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며 기다려주었기에 가능하다.


우린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고 그런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존재를 원하지 않을까?

내가 손절하고 싶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마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 반대로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기다려주기에는 내 품이 넓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상대방이 나를 기다려준다면 한없이 고마울 거다. 나를 단정 짓고 손절하지 않고 가능성을 보며 기다려주는 상대가 말이다.


상류의 모난 돌들이 물속에서 굴러내려가면서 서로에게 부딪혀 부드럽고 예쁜 돌들이 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갈등 속에서 부딪히고 힘들겠지만 다른 사람의 부딪힘에 포기하기보다 나를 성찰하고 깎아내는 시간을 통해 더불어 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들로 거듭나는 노력들이 더 많아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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