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쉬냐고? 죽어야 쉬지. 죽어야 무덤 속에서 발 뻗고 쉬는 거여.”
어릴 적 읽었던 한 동화책에서 한 농부가 한 대사였다. 전체 줄거리도, 정확한 워딩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사시사철, 일 년 365일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리던 농부는 언제 쉴 수 있냐는 질문에 저런 퉁명스런 답을 내놓았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다소 어린이가 읽기에는 좀 지나치게 ‘다크’했던 이 동화책을 보고 농부들의 삶이란 참 불쌍하구나, 정도의 감상을 얻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동심에 꽤나 충격이었는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저 대목만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걸 보면 ‘죽어야 비로소 쉬는 삶’이 어지간히도 불쌍했나보다.
시간은 흘러흘러 아이를 키우며 직장일도 하는 나는 지금 저 그림책 속 농부처럼 대체 언제나 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농부가 하는 고된 육체노동과 굳이 비교하자면 노동강도 측면에선 비교가 안 되겠지만, 제대로 쉴 틈이 딱히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차라리 이렇게 지낼 바에야 몸이 아파져서 강제로라도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10, 20대 한창 어릴 때는 골골거리던 몸이 이제는 오히려 청개구리마냥 더 건강해져서 그 흔한 코로나조차 나를 비켜갔다. 하기야 진짜 아프다 해도 그 때는 아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더 곤란해지거나, 결국 내가 아픈 몸을 끌고 육아까지 해야 되니 차라리 몸이라도 건강한 게 낫지만 말이다.
워킹맘은 언제 쉴 수 있을까. 아이가 없는 직장인들이 퇴근 후에는 그래도 짧게나마 숨을 돌릴 수 있고, 주말에는 사교활동과 취미활동 혹은 하루이틀이라도 푹 쉴 수 있다면 맞벌이 부부는 퇴근후에는 집으로 출근해 본업보다 더 고된 육아노동에 전념한다. 한 명이 아이를 보면 다른 한 명은 밀린 빨래와 저녁식사 준비, 집안 정리정돈 등을 하느라 엉덩이 붙일 새가 없다. 주말에는 주중 내 함께 못했던 아이와의 ‘퀄리티 타임’을 위해 집과 밖에서 몸과 마음을 불살라 놀아주느라 온몸이 다 노곤노곤해진다. 연월차? 그건 아이가 다니는 기관의 방학, 아이가 아플 때, 기타 유사시 보육 공백이 생길 때 요긴하게 쓰기 위해 아껴둬야 한다.
남편 찬스, 조부모님 찬스도 마음이 불편해서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미 나보다 더 힘들게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남편에게 나 좋자고 육아와 가사를 일임해두고 나가 놀아 봐야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얼른 들어가야지 싶은 생각에 맘껏 쉬지도 못한다. 나이 드신 조부모님이야 말해 뭐해. 이러니 아이를 낳는 순간 완전한 자유는 당분간 사라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Polina Zimmerman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물론 아이가 잠들고 나면 옆에 앉아서 폰을 잠깐 만질 수 있는 정도(그나마도 아이가 잠을 설치면 휴식시간 강제 종료지만)의 짧은 휴식시간은 있지만, 하루를 온종일 내서 푹 쉬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워킹맘이 쉬는 시간은, 업무시간 중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잠시 짬이 날 때 차를 한 잔 하는 시간이다. 그 때가 가장 여유롭다.
사회 초년생 시절 '꼰대'들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 회사에서 별다른 일도 안 하면서 시간을 때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했었다. 대체 얼마나 가정사가 불행하길래 다들 1초라도 빨리 퇴근하고 싶어하는 회사에서 놀고 싶어하는 걸까? 심지어 혼자 노는 건 심심하다고 만만한 부하 직원들까지 강제로 참여시키고 말이다.
그때 치를 떨었던 나는 나이를 먹고 어느새 준 꼰대 나이가 되어 회사일보다 더 빡센 육아에 시달리고 나면 출근 후 업무시간에 '한 숨을 돌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래서 사람 일이란 정말 알수가 없는 거고 남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걸까. 물론 아시다시피 육아인은 누구보다 맹렬히 혼자 있고싶어하는데다 원래부터 프로 '혼자놀기러'인 나는 굳이 다른 동료를 괴롭힐 이유는 없다.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커피와 간단한 간식을 사다 먹으며 잠시 즐기는 나만의 티타임, 출퇴근길 동요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고요히 생각에 빠질 수 있는 대중교통 안에서의 시간, 이런 것들이 워킹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휴식시간이다. 심지어 지금 쓰고 있는 이 시리즈조차 80%는 업무시간 중 짬짬이 쓴 글이다.(그래도 할 일은 다 하고 썼다!) 다 합해도 두어시간이 채 다 되지 않을 정도지만 이렇게 한 숨 돌릴 틈이라도 있어야 또 힘내서 아이와의 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거니까 오늘도 있는 힘껏 쉼을 확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