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계형 워킹맘입니다 24
흔한 조리원 동기도, 아는 동네 엄마도 없던 나는 아이가 세 돌이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육아 동지 친구'가 없었다. 유일하게 육아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은 남편이나 가족, 혹은 비슷한 나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뿐이었다. 우리 업계 그 중에서도 내 지인들은 공교롭게도 결혼과 출산이 늦어졌고 워킹맘으로서 전업 엄마들과는 생활 패턴이 아예 다르다 보니 마주칠 일이 도통 없었다. 어쩌다가 등원길에 다른 아이 엄마들을 마주쳐도 짧게 인사나 할 뿐 얼른 출근길을 재촉해야 하기에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쯤 되면 그래도 동네 엄마들을 좀 알아 놓으며너 아이의 친구관계 '네트워킹'을 해 주는 것이 요즘 엄마들의 법칙(?)이라는데, 은근히 신경쓰였지만 어차피 곧 이사 계획도 있고 아이도 아직 어려서 특별히 나설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학창시절부터 '여자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끼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심지어 맘카페를 보면 엄마들 모임에서 뒷통수를 맞고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는 사연이 어찌나 많은지, 동네 엄마들과는 친분을 아예 안 쌓는게 정답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아직까지는 또래 친구를 만드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지난번 갑작스러운 가정어린이집 폐원 후 급하게 민간 어린이집으로 옮긴 후 혹시나 적응을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하루이틀만에 같은 반 아이들 이름을 싹 외우고 먼저 다가가서 놀자고 하는 아이였다. 한두 달이 지나니 그새 좋아하는 여자친구도 생겨서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다니며 사이좋게 논다는 선생님의 전언을 들을 정도였다.
우리 집은 남편이 교대근무여서 평일 낮에 시간이 될 때는 직접 하원을 한다. 어릴 땐 하원 후 별 일이 없으면 바로 집으로 갔지만, 언제부턴가 하원 후 코스는 동네의 좀 큰 놀이터가 됐다. 알고 보니 거기서는 같은 반 아이들이 하원 후 하나씩 모여서 자연스럽게 같이 모래놀이도 하고 미끄럼, 그네도 탄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등하원을 자주 하는 남편은 이미 같은 반 아이들과 엄마들 몇몇의 안면도 텄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집에 가기 전 '오늘도 놀이터에 있겠구나' 싶어서 남편에게 연락을 했더니 놀랍게도 친구네 집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몇 번 어린이집 앞에서 간단히 인사만 한 아이의 집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집에까지 들어갔다니, 심지어 우리 남편만 남자일텐데(!) 혹시나 민폐를 끼친건 아닌가 싶어서 그 다음날 일을 부리나케 끝내고 아슬아슬하게 아이들 먹을 우유랑 컵과일 같은 걸 사서 직접 하원을 하러 갔다. 다행히 신세를 졌던 집 엄마도 와 있었다. 나는 간식을 주면서 혹시나 우리 집 아이와 아빠가 불청객이었던 건 아닌지, 실례를 해서 죄송했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 집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너무 잘 놀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 날의 경험이 무척이나 좋았는지 한동안 ㅇㅇ네 집에서 놀았다며, 다음에는 우리 집에도 친구들을 부르자고 성화였다. 아무튼 그 날이 계기가 됐는지 우리 아이와 그 집 아이, 그리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친구' 등 3명의 같은반 아이들은 놀이터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3인방으로 사이좋게 지냈다. 고작 만3세일 뿐인데 벌써 무리짓기를 하고 종종 친구들에 대한 좋고싫고를 말하는 게 놀랍기도 했다. 정말 신기한 것이 이 만한 아이들도 가장 좋아하는 친구, 덜 좋아하는 친구, 안 좋아하는 친구가 명확하게 있고 리더 역할을 하는 아이와 팔로워 역할을 하는 아이, '인싸'와 '아싸', 성격이 내성적이든 발달이 느려서든 공격적인 행동을 해서든 어떤 이유로 다소 소외되는 아이가 명확히 보였다(단순히 존재감이 적은 아이와 명확히 소외되는 아이가 구별된다는 점도 상당히 놀라운 부분이었다). 주로 아싸와 소외되는 아이 롤을 오가던 내 어린시절과 달리 다행히 우리아이는 아직까지는 인싸에 속하는 것 같아서 내심 안심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사회화가 되어가고 '절친'과 '친구'들을 만들어가는 동안 나도 문외한이었던 동네엄마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물론 따로 보거나 연락을 할 정도로 친해지진 않았지만 적당히 거리와 예의를 지키는 지금의 상태가 워킹맘으로서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다른 엄마들끼리는 더 친할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동네엄마를 사귀는 '목적'은 아이의 친구 만들기도 있으니 아이가 잘 어울리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또 다른 육아 동지 친구들은 바로 일적으로 만나는 직장 동료들이다. 그간 미혼이나 임신 전이었던 동료들도 한두살씩 나이를 먹다 보니 슬슬 임신과 출산을 하며 육아 세계에 합류하고, 복직을 하며 '워킹맘'의 험난한 삶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고 '학업'이나 '학원정보' 등이 절실하지 않은 시기여서 그런가, 개인적으로는 직장동료 육아동지들과 더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일 끝나고 육아 출근하는 워킹맘의 톱니바퀴와 같은 삶 속에서 함께 울기도 하고 위로도 하고,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진지하게 퇴사 계획(?)도 짜 봤다가, 때론 육아 정보도 공유하고, 마인드 컨트롤도 도와주는 그런 관계들. 또 다른 직업군에서는 공감을 받기 어려운 우리 직업군 워킹맘들만의 공감대 형성도 쉽다. 일일히 설명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관계로 대체되지 않는 소중한 관계들이다.
아기들이 하나씩 걷고 말하고 아기에서 유아가 되어가면서 때로는 아이들을 동반하고 만나 키즈카페 같은 곳을 같이 가기도 한다. 이럴때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아이의 엄마들로서 만나서 육아의 시간을 공유하기도 한다. 생활패턴이 비슷하다보니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보다 시간조율도 보다 용이하다. 아직까지 아이는 처음 보는 또래 친구나 아기 동생이어도 격의없이 쉽게 친해지기 때문에 외동인 우리 아이 입장에서도 다양한 아기들을 만나 본다는 점에서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
워킹맘들은 그 자체로도 힘들지만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줄 물리적 시간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많이들 고충을 호소한다. 나 역시 그나마 시간과 공간이 자유로운 직업이 아니었다면 어쩌다 가끔이라도 하원 후 놀이터에서 아이 친구들과 엄마들을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외에서는 아이가 있는 가정의 부모들은 오후 3시, 4시 이른 시간에 퇴근이 가능해 방과후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다 용이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맞벌이 부모들도 '밤 10시까지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 따위가 아니라 해가 아직 떠 있을 때 하원을 해 내 아이가 요즘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인사도 하고 그 부모님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육아를 원한다. 결국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