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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라는 '사이다'는 없을지라도

by 뚜벅초

내가 본 수 많은 책들, 기사들, 수기들, 온라인의 글들, 영화나 드라마의 흔한 플롯은 이랬다.


누구보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온 주인공은 어느날 육체적 혹은 정신적 질병을 얻게 된다.

의사 선생님의 '너무 열심히만 사셨습니다. 이제 좀 쉬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고민하다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를테면 <조화로운 삶>의 저자인 니어링 부부의 한적한 숲 속 집과 같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사본 -pexels-ann-h-45017-21562934.jpg 사진출처: pexels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히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퇴사라는 선택지는, 세상에 유통되는 수많은 '퇴사 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여성의 퇴사는 자유의 선택이 아닌, 일과 양육을 저울질하다 결국 엄마 역할에 더 충실하기 위해 '안타깝게도 경력 단절을 선택하고 만' 실패 사례 1로 쉽게 가늠되곤 한다. 그 선택의 동기가 자발적이었는지, 타율적이었는지, 혹은 자의 몇 퍼센트, 타의 몇 퍼센트의 어느 스펙트럼 안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세상은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기혼 유자녀 여성의 퇴사는 자유 찾기가 아닌 전업주부로의 이직으로 결론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직장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가사노동, 육아노동을 맡게 된다. 요즘 젊은 며느리로서 대충 외면하고 지냈던 시댁에 대한 의무도 갑작스레 얹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둔 나는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해 '편히 노는 팔자'로 감안될 가능성이 높기에, 이 모든 의무를 모른척할 자신이 없었다.


끝도 없고 티도 안 난다는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직장생활 만큼이나 만만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그 만만치 않은 노동을 감내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엄마는 위대하다' 등의 미사여구 외엔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있다. 나 역시 아이가 어릴 때 육아휴직을 1년간 하고 가정보육을 하면서 생전 안 걸리던 우울증으로 약을 먹었으니까. 그 시기로 다시 돌아가라면, 정말 절레절레다. 우울증 약도 복직하면서 즉시 끊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워킹맘을 그만두고 퇴사한 사람들의 사연이 담긴 책을 빌렸다.

하지만 같은 워킹맘이어도 상황과 가치관이 천차만별이라,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는 삶이란, 역시나 내 예상대로, 퇴사를 한다 해도 녹록치가 않았다. 여유는 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받게 되는 완벽한 육아와 가사에 대한 압박으로 힘든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퇴사는 내 생각처럼 만병 통치약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비되지 않은 양가의 노후, 아직은 많이 남은 집 대출, 앞으로 수없이 들어갈 아이의 교육비, 적은 분량이나마 내 몫으로만 돈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마음, 또...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는 안정감, 가뭄에 콩 나듯 드물지만 그래도 일을 통해서 얻는 성취감 등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의 잠정적인 결론은 이랬다.

퇴사하고 꿈의 숲 속 집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대신, 일단은 퇴사하지 않기로.

퇴사하지 않고 이 도시에서 생존해 보기로.

그렇더라도 여유를 찾으며 살기로.

너무 나를 몰아세우지 말고, 다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기로.


근데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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