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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공황장애?

by 뚜벅초

나에게는 공황장애가 올 정도의 큰 이벤트는 없었다.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게 분명했지만, 아이도 이제 혼자 화장실에서 뒷처리를 하고 나올 정도로 많이 자랐고, 직장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래도록 꿈만 꾸던 내 이름이 달린 저서를 내기도 했고 그 외의 특별한 갈등 관계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잘만 살아가는데?'

사실 그 마음이 문제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공황 증상(공황발작이라고 한다) 때문에 일상 생활이 힘들 지경이 됐다. 심지어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나타났다. 결국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전화해 예약을 잡았다. 가장 빠른 날짜가 4일 뒤였다. 그걸 기다리는 시간이 나에겐 아마도 가장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누구라도 좋으니 약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이 증상을 가라앉히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약을 간절히 원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싶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문제없이 성실한 근로자고 든든한 엄마고 신뢰할 수 있는 배우자고 믿음직한 자식이고 싶었다. 내내 그렇게 살았다.

약을 먹든 어떻게 해서라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회의실에서 갑자기 찾아온 공황발작을 티내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하고 시야를 애써 자연스럽게 처리하려 노력했던 시간처럼.


세상은, 사연있는 사람을, 특이한 사람을, 병든 사람을, 낙오된 사람을, 자연스럽게 도태시키곤 하니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은 그러했다.

사회성이 떨어져서 또래들에게 배척당했고 공부를 충분히 잘하지 못해서 엄마에게 야단맞았으며 일 머리가 부족해서 선배들에게 갈굼을 당했고 애를 낳고 복직해서 돌아온 직장에서는 엉뚱한 부서로 보내 고의적으로 따돌렸다. 남다른 가정사를 밝히면 약점으로 돌아왔고 허름한 신혼집 사진을 올리면 동정을 받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괜찮은 척, 문제 없는 척, 잘 나가는 척, 멀쩡한 척 해야 했다.

약을 먹어서라도.

나에게 필요한 건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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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신과 진료 날이 됐다.

아이 낳고 7개월쯤 산후우울증으로 처음 정신과를 방문했고, 반 년 정도 우울증 약을 먹다가 단약하고 나선 다시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찾게 되다니. 인생 정말 알 수 없구나.

어쨌거나 여기는 심리상담소가 아니라 병원이니까 간단한 문진과 함께 약을 내어주겠지.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누군가에게 내 심정을 털어놓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오로지 시도때도 없이 진동하는 내 심장을 차분하게 만들 약만이 필요했다.


예상과 달리 병원에서는 뇌파 검사와 심전도 검사, 간단한 심리 상태 문진까지 했다. 검사 결과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양호하지도 않았다.

좌-우뇌간 불균형이 있었고, 심장 건강이 좋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뇌파 검사 결과 높은 스트레스와 함께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 또한 매우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높게 솟아 있는 스트레스 뇌파의 파도를 의지력의 방파제가 애써 막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프상 나의 뇌파는 스트레스의 파도가 의지력의 파도를 조금 더 뛰어넘고 있었다.

언제부터 뛰어넘게 됐을까.



의사 선생님은 '공황장애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나의 근황과 함께 최근 있었던 일, 심지어 원가족 관계까지 상세히 물으셨다. 막상 진료실에 들어서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져서, 나의 가정사까지 낱낱이 까발리게 됐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결국 부부 사이도 안 좋아지신데다 형제도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걸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될까봐 무서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도 최대한 오래 잘 하고 싶고 아이도 잘못되지 않도록 최대한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거워요."

나의 예상과 달리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공황장애는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얇은 다리의 테이블에 벽돌을 계속 올린다고 치면, 한두 개를 올릴 때까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지만 다섯 개, 여섯 개로 늘어나면 결국 테이블 다리가 부러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의 어딘가도 잠시 부러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기질적으로 불안을 잘 느끼는 마음과 가정사까지 더해져, 정상적으로 불안을 관리하는 신경 구조가 망가져 시도때도 없이 불안을 느끼는 상태까지 이르게 됐단 것이다.


언젠가 영화관에서 <인사이드 아웃2>를 보던 때가 생각났다.

영화에서 거의 '빌런' 취급을 받던 불안이를 보며 나는 깊이 이입하고 있었다. 심지어 불안이의 말과 행동에 공감을 하기도 했다. 진로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잖아, 최선을 다 하는 게 당연한거지, 그게 왜 잘못된거지?

왜 불안이를 억지로 진정시키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안이 이끌어 온 나의 삶은 그럭저럭 외형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사회성을 갖춰서 그럭저럭 낯선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게 됐고, 전화 공포증이 있던 나도 전화로 취재를 하는 일을 십 몇년 째 하고 있다. 많지 않은 나이에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오롯이 내 힘으로 결혼하고 자식도 잘 자라고 있고 작지만 집도 있다. 정상적인 삶과 가정을 오래도록 꿈꿔왔던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은 팔 할이 불안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이제 잠시 멈춰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머니까. 남들도 잘 버티고 사니까.

심지어 나는 홀몸이 아니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내 아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나를 갈아서라도 좋은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하니까. 실제로 나를 갈아넣는 작업은 꽤나 고통스러웠지만 결과는 아직까진 나쁘지 않았다. 내 기질을 물려받아 예민함이 제법 있는 아이가, 사회성도 좋고, 느렸던 발달도 정상 수준으로 따라잡았고 부모와의 애착 형성도 잘 이뤄졌다. 내 육아가 항상 행복했다고는 얘기하기 어렵지만 아이는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소리지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심리검사 결과를 보면 그렇게 심각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이게 주관적으로 느끼는 걸 체크한 거라 객관적으로 진짜 그 정도인지,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어요."

"일단 약을 먹으면서 경과를 볼 건데, 그것과 함께 모든 걸 너무 잘 하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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