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by 뚜벅초

아이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던 어린 아기 시절, 코로나 시국을 맞아 외출 한 번 하지 못하고 집 안에 갇혀 못 자고, 못 씻고, 못 먹는 날들이 계속됐다. 남편은 교대근무를 하느라 이틀에 한 번 집에 오고, 아기띠로 안고 있지 않으면 울고불고하는 예민한 아기를 돌보며 내 정신이 점점 무너짐을 느꼈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대성통곡을 할 것 같은 울분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육아의 무한한 행복 따위는 남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기는 누구보다도 주양육자의 마음 상태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내면화한다고들 했다. 그래서 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도 아기와 눈이 마주치면 있는 힘을 쥐어짜내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명랑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기분을 전환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기가 새벽 두 시 가까이 되어 겨우겨우 잠자리에 들면 쏟아지는 눈물과 설움을 이겨낼 길이 없었다. 피곤한 남편을 붙들고 울고불고 하소연할 때도 적지 않았다. 물론 아기가 잠에서 깨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척 '연기'를 했다.


내 인생에 가장 힘든 감정노동이었다. 내 마음의 어둠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가장 힘빠지게 만드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리 겉으로 애를 써도 아기들은 귀신같이 엄마의 마음을 읽어낸다. 억지로 행복한 척해봤자 아이들은 다 안다. 엄마가 힘들고 우울해하면 아이도 똑같이 그 감정이 전염돼 우울한 아이로 자라고 만다!"

무시무시한 이 말 앞에서 나는 그만 아무 의욕도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통잠은커녕 날밤을 새기도 일쑤였고, 분리불안이 극심해 식사도 화장실도 아무것도 제대로 하기가 어려운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기란 마치 빵 두 개로 5천명을 나눠 먹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들렸다. 나는 신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이기에, 그냥 아이한테 최대한 나의 힘듦을 겉으로나마 전가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부족한 어미라고 손가락질해도 정말로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들은 내게 육아를 진심으로 즐기지 못한다고 비난은 할 망정 누구 하나 아이를 직접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릴 적 나는 우울한 아이였다. 부모님은 자주 내 앞에서 욕설을 하며 싸웠고, 가정불화로 어릴 때는 외갓집에 맡겨져서 길러졌다. 유치원 갈 나이가 될 때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바뀐 환경에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향과 맞물려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관에 적응을 못하고 늘 치여 지냈지만 생계가 바쁜 부모님은 그런 내게 쓸 심적 여유는 아예 없었다. 왜 다른 집 아이들처럼 무던하게 지내질 못하고 계속 징징거리냐고 신경질적으로 대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 아이도 자칫 그렇게 될까봐 무척이나 걱정이 됐다. 육아가 행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이가 잠들면 눈물로 사과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간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무척 행복하고 당당한 아이로 자라나고 있다. 늘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겉돌던 나의 어린시절과 달리 처음 본 아이들과도 절친이 되어버리는 아이, 어디가나 가장 '인싸'무리에 속하는 아이를 보면 정말 자식은 겉 낳지 속 낳는 게 아니라는 옛말을 실감하게 된다. 표정도 밝고 감정 표현도 자유롭고, 분위기 메이커라는 칭찬을 자주 받는다. 6살이 되어 추상적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게 된 우리 아이는 최근 엄마 아빠와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내 아이가 애써 숨긴 내 마음 속 우울을 눈치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 앞서 겉으로 보여주려 했던 미소와, 비록 100% 진실은 아닐지언정 노력으로 끌어모아 보여주려 했던 밝은 면에 더 집중했던 게 아닌가 싶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네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한국인의 심리 기저에 폭넓게 작용하고 있는 신화가 아닐까 싶다. 한국은 '고맥락 문화권'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고맥락 문화란 감정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간접적인 방향으로 '눈치껏 알아채도록 하는' 방식의 의사소통을 택하는 문화다. 눈치가 다소 느린 편인 나는 바로 이놈의 고맥락 문화 때문에 사회 초년생 시절 무척이나 고통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대놓고 시키지 않아도 정황상 필요할 것 같으면 제깍제깍 미리미리 챙겨놔야 하고, 알아서 모셔야 하고, 높은 분의 의중을 헤아려 그분의 심기를 맞춰 드려야 하며, 그 와중에 내 것을 뺏기지 않게 옆사람과 미묘한 기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 사회생활의 실체였다. 이런 식의 소통에 정말이지 젬병인 나는 그래도 15년이라는 사회생활 짬밥 속에 대충 피아식별 정도는 할 수 있는 눈치가 얼추 생긴 것 같다.


이는 한국인의 사회생활뿐 아니라 가족관계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다. 배우자에게 대놓고 요구하는 건 웬지 자존심 상하니, 저 사람이 알아서 나를 챙겨줬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막상 챙겨주지 않으면 웬지 서운해서 심통을 내버리고 마는 상황. 며느리/사위가 경조사를 알아서 챙겨줬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깜빡하고 넘어가면 대놓고 챙겨달라고 하기엔 모양 빠지는데 그래도 너무 서운해서 용심을 부리게 되는 모습. 처음부터 대놓고 해 달라고 요구하면 모두 편할 일인데 왠지 그렇게 하면 '엎드려 절 받기'같아서 싫은 것 같다. 알아서 챙겨 주면 "아이구 뭘 이런 걸 다~"하면서 짐짓 사양하는 척 슬쩍 챙기는 게 한국인의 '정'문화라는 것이다. 대놓고 "나 이거 필요해"해서 받으면 정도 없고 재미도 없다. 아니 애초에 대놓고 말하게 만들고 미리 안 챙기는 저 녀석이 좀 눈치 없는 놈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다수의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인 것 같다. 다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아직 인지가 덜 자란 아기조차도 마치 독심술사처럼 부모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도 그렇고 내 아이를 봐도 딱히 말하지 않은 타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꿰뚫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시큰둥하게 "괜찮아"라고 한다면 당연히 뭔가 기류가 이상함을 눈치채겠지만, 굳이 티내려 하지 않는다면 별 일 없는 줄 알 것 같다. 그리고 사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아무리 고맥락 한국사회라고 해도 말이다.


오죽하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사모곡까지 있을까. 엄마는 죽어라 밭일하고 찬밥 한 덩이로 끼니 때우고 식구들부터 먹이고 자신은 쫄쫄 굶어도 "나는 괜찮다, 나는 너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셨으니 괜찮은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자녀의 한탄이다. 물론 정말로 내 배 부른 것보다 내 자식 배 부른 것이 나은 게 엄마의 심정이기도 하지만, 때론 엄마도 정말 안 괜찮으실 때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자식들은 대개 모른다. 자식이란 (나도 그렇지만) 대체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부모님의 '말하지 않은'의중 따위는 모른다. 내가 부모님께 서러웠던 건 내가 밖에서 학교폭력을 당할 때 오히려 내 탓을 했던 일, 성적이 떨어졌다고 때리고 욕을 했던 일, 내 앞에서 대놓고 욕설을 하며 싸우셨던 일 같은 것들이다. 대놓고 상처를 받은 일들이다. 어쩌면 부모님도 나에게 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말들이 많으셨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난 알지 못한다. 그저 나도 엄마가 되니 어렴풋이나마 추측하게 됐을 뿐이다. 우리 부모님은 사업이 완전히 파산하기 직전까지 내게 단 한 번도 가정 경제 상황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갑자기 집이 망해서 대학 등록금을 대출받아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적잖이 놀랐다. 차라리 미리 알았더라면 이래저래 대비를 했을텐데. 철없는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외로 떠나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가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이후부터는 가능한 공유해도 괜찮은 것들과 감정을 최대한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아이가 알기에 부적절한 감정은 딱히 공유하지 않지만, 이러저러해서 어렵다, 이러저러해서 힘들다, 혹은 내일은 엄마가 회식이 있어서 집에 좀 늦게 들어올 것 같으니 아빠하고 먼저 자고 있어야 해, 라고 말하면 아이는 좀 서운해해도 받아들인다. 오늘은 아빠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쉬시라고 하고 우리끼리 저쪽 방에서 놀자고 설득한다든지.


말하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우리이기에 터놓고 말했으면 좋겠다. 눈치주고 눈치받고 왜 눈치껏 하지 못했냐고 원망하고 서운해하고 갑작스러운 한풀이로 터트려버리지 말고, 아니면 꾸역꾸역 참다가 병이 되어서 겨우 챗GPT에게만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사회보다는 서로 원하는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나 역시 고맥락 문화에서 자란 탓에 가끔씩 내 의중을 알아차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세상 사람 마음이 모두 나같지 않음을 되새기고 나 역시 타인에게 무지로 인한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먼저 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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