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아무 생각없이 화내지는 않고 싶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가장 굳게 다짐한 게 있었다. 첫째는 아이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아이가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화를 내지 않기. 둘째는 아이 앞에서 부부싸움하지 않기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부모님의 인신공격과 화풀이성 분노, 훈육을 오롯이 상처로 적립해가며 자랐던 나는 나도 모르게 내재된 분노를 아이에게 풀게 될까봐 너무 두려웠다. 임신 중에는 그게 너무 두려운 나머지 난생 처음으로 심리치료센터를 찾아 상담을 받았고 각종 육아서를 탐독했다. 한동안 하지 않았던 명상도 다시 시작하며 마음 다잡기를 시도했다. 상담 선생님은 남편과의 언쟁이 일어날 것 같을 때, 화가 무척이나 날 때 심호흡을 크게 세 번 하라고 조언했다. 몸이 진정되면 뇌도 따라 진정될 것이라고.
지금도 못내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예정보다 임신을 빨리 하게 된 탓에 체력을 충분히 만들어놓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기를 만나기 전 나는 체력이 떨어지거나 몸이 아프면 주변 사람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거나 짜증을 내게 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로 짜증을 내고 있나 돌이켜보면 어김없이 잠을 덜 잤거나 몸 상태가 안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 출산 전에는 충분한 기초체력을 만들어야 아기에게 짜증을 덜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체력을 만들어놓지 못한 점이 계속 신경쓰였다.
하지만 내가 아기에게 짜증을 내게 되는 순간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시점이었다.
아기가 밤잠을 통 안 자던 50일 이전 신생아기에는 짜증이나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아무리 달래도 울기만 하는 '원더윅스(급성장기)' 시기에 혼자서 아이를 하루 종일 보다, 심호흡정도로는 감정이 도저히 조절이 안 될 정도로 지친 날은 잠시 아이를 눕혀두고 다른 방으로 가서 소리를 지르고 오기도 했다. 건강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아기 앞에서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진짜로 화를 참지 못한 순간은 전혀 엉뚱한 때였다. 아기가 어느정도 밤잠을 안정적으로 자기 시작하면서 나는 낮 시간 동안 못다한 일들을, 아기가 잠드는 저녁 9시 이후에 몰아서 하겠다고 벼르곤 했다. 다행히도(?) 야행성인 나는 새벽 한두시까지는 깨어있는 게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아기가 잠만 자면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고 홈트레이닝도 좀 하고 책도 읽고 그리고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도 써야지, 등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잔뜩 세워놓았다.
하지만 때로 아기는, 인형이나 로봇이 아닌 사람인 탓에 딱 정해진 9시만 되면 눈을 감고 자는 건 아니었다. 가끔은 잠투정이 심해 오랫동안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어렵사리 재우고 나서 밥을 한 술 뜨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혹은 낮잠을 많이 자서 밤잠을 늦게 자기도 했다.
어느때보다 많은 계획을 세웠던 날, 그날따라 아기는 밤 11시가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급성장기의 성장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말 못하는 고통에 서럽게 우는 아기를 달래며 잠을 재우려 하겠지만 그날은 내가 세워 둔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게, 아기를 재우고 나면 결국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잠만 자야 된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나는 미처 감정을 조절할 겨를도 없이 큰 소리로 짜증을 내며 방 불을 다 켜고 말았다. "잠이 안 오면 그냥 놀아!" 그 순간 나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어린날의 우리 아빠의 모습을 내게서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태어난 지 결국 5개월 남짓밖에 안 되는 작은 아기에게 무슨 짓이었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솔직히 이런저런 말로 합리화하고 싶지는 않다. 육아는 원래 힘드니까, 엄마도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아기들도 어차피 크면 이꼴 저꼴 다 보게 될텐데 어른의 나쁜 감정을 미리 보고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남들도 다 그렇게 키운다.... 물론 이런 말을 듣는다면 내 마음은 잠시 편해지겠지만 글쎄, 결국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는 엄마가 될 것이고 자연스레 그 화의 강도는 점점 높아질 것이다. 나중에는 남편과의 사이가 나빠서, 집에 돈이 없어서, 오늘 몸이 안 좋아서, 그냥 이유없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아이가 자꾸 귀찮게 군다는 이유로 짜증을 버럭버럭 내는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나의 화난 얼굴에 ‘내성’이 생긴 아이는 언제부턴가 혼날 일이 생겨도 그리 경각심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훈육이 더 어려워지겠지. 내가 그렇게 자라왔던 것처럼.
아기에게 짜증을 낸 그 날도 많은 부모들이 그렇듯 죄책감에 시달렸다. 머릿속에서 '그것 봐라, 역시 사람은 보고 배운 대로 되물림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어떤 이유로 화를 내게 됐는지를 먼저 짚어 봤다. 그래야 앞으로 비슷한 상황을 최대한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차근히 짚어본 결과 나는 내 계획이 엎어지는 상황이 미치도록 싫었던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평소에도 계획에 집착하는 편인 나는 마음속의 계획이 어그러지면 심하게 짜증을 내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아이를 보는 동안에는(특히 남편이 없이 혼자 보는 날은) 오롯이 아이에게만 집중하고 그 이후의 것을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설거지와 빨래가 조금 쌓이면 어떤가, 운동을 하루쯤 건너뛰면 어떤가, 글을 좀 안 쓰게 되어도 크게 상관없다. 그보다는 아기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 당연히 중요하다.
아기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비록 나의 썩 좋지만은 않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순한 심성과 헌신적인 육아 도움 덕분에 애초 큰 싸움으로 번질 일이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초를 다투는 바쁜 육아 일상이 서로를 지치게 해서 간혹 퉁명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있다. 신혼 초기에 자주 싸움이 되는 소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통정리(?)를 해서 다행히 그 주제로는 더 이상 싸우지 않는 편이고, 그나마 요즘 문제가 되는 소소한 살림 방식의 차이 등은 아무래도 나의 순간적인 감정을 좀 더 컨트롤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요즘은 아기를 재운 뒤 차 한잔을 마시며 대화로 풀려고 한다. 그나마도 너무 피곤해서 못 하고 잠들 때가 많지만.
물론, 앞으로 아이에게 자아가 생기고 고집이 생기면, 반항을 하게 되면, 그때는 또 어떤 방식으로 내 감정을 다잡을 수 있을지는 또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거나, 심하면 인신공격을 하거나, 빈정대거나, 지나친 체벌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내 감정에 의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그럴 수도 있다'고 합리화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아무 생각없이 내가 받은 상처를 그대로 아이에게 되물려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