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려고 회사에 다닌다

by 뚜벅초

퇴사 에세이가 많은 브런치에서 마치 이런 글은 저격 같기도 하지만, 맹세코 절대 특정인을 저격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퇴사를 결정한다. 더 이상 회사의 부속품으로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인생을 다 보낼 순 없다는 생각에서일 거다. 나 역시 직장 생활만 15년을 해 오니 그 심정이 어떠할지 심히 공감이 간다.


그럼에도 나는, 인생의 전반부를 넘기고 나 자신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직장에 몸을 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앞날은 모르지만.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여러모로 괜찮은 '직업'의 여건과 벌이가 보장된다면, 그 땐 모르겠다. 즉 내 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 같은 말은 아니다. 회사 일은 어디까지나 오너의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직장 생활이 10년이 넘어가면 회사에서의 성공이 자아실현과 등치되지 않음을 뼛속 깊이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이유는,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정확히 말하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금전적인 이유도 크지만 어쨌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혼 유자녀 그리고 이제 40대의 초입에 들어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편 중 하나가 직장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20대와 30대의 내게 했다면 무슨 인생이 그렇게 시시하고 재미없냐고 욕할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현재의 직업을 선택할 때 짧으면 3년, 길어야 5년 정도 일하고 프리랜서로 독립하고 싶다고 야심찬 꿈을 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 경력만 있는 사람이 프리랜서로 독립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고, 더군다나 '글'로 먹고산다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나는 비록 잘 알려진 인플루언서와는 거리가 멀지만 블로그를 10년 가까이 운영해오고 있고 나름대로의 수익도 냈으며(노동소득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출판사 투자를 받아 기획출간도 했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일도 어쨌거나 큰 틀에서 볼 때 글로써 먹고산다고 볼 수 있는 직업군이다. 그럼에도 전업 작가가 된다는 선택은 정말로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단순히 수익화를 위한 글을 쓰자면, 솔직히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돈 때문에 글 쓰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일테니까.


아무튼 이렇게 애매한 상태에서 뭔가가 되겠다고 회사를 나오면, 글쎄, 딸린 가족이 없다면 진짜로 '뭐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나는 물욕엔 크게 관심이 없고 최근에는 남한테 있어 보이는 데도 별 관심이 없어졌다. 그래서 내가 좀 비좁은 집에 살고 좀 남루한 옷을 입는 건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가정이 딸리면 얘기가 다르다. 특히 나처럼 기혼 유자녀 여성이면 나에게 붙은 정체성은 현실적으로 작가니, 프리랜서니가 아니라 그냥 '경단녀'가 될 것이다.


물론 남의 시선 때문에 일을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글쓰는 삶에 대한 꿈이 그저 '애 키우느라 눌러앉은 주부'의 흔한 케이스로 납작하게 소비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두 번째는 나 스스로도 나를 작가나 프리랜서가 아닌 주부로 보게 되고, 행동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육아휴직 때의 경험으로 볼 때 주부로서의 삶은 딱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마 회사라는 강제력이 없는 한 하루 일과의 대부분 시간을 자연스레 가사나 육아에 많이 투입하게 될 것이다. 결국 저자로서의 혹은 그 외의 정체성은 우선순위가 한참 낮아지게 되는 수순이다.

실제로, 주부의 삶은 생각처럼 한가롭지 않다. 자녀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주부를 하나의 어엿한 '직업'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엄마들에게는 기관이나 학교에서 전화를 걸어 각종 행사에 동원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가 7살이지만 이제까지 어디서도 그런 류의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나마 내가 '직장인'이라는 옷을 입고 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일에서 면피가 됐었구나 싶었다. 또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 공동체를 위해 노력봉사해주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도 드리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20대, 아니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 이 나이까지 이 일을 계속하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내 발로 나가든지, 아니면 남의 발로 나가게(?) 되든지 하게 될 것 같았다. 가장 큰 이유는 우선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2010년대만 해도 40대 이상의 여성 사무직 직원을 보기가 어려웠다. 처음 회사란 곳에 출근을 하던 2011년, 여의도로 가는 대중교통을 빽빽하게 채운 수많은 직장인 중 중년층 이상의 여성은 거의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무심코 발견하고 속으로 놀랐던 적이 있다. 어쩌다 가끔 중간관리자급 이상에 여성분들이 있다 해도 대부분 미혼이거나, 자녀가 없으셨다. 그리고 대부분 일을 엄청나게 잘하고 성격이 몹시 강했다. 나와는 많이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와는 다른 루트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나브로 세상이 바뀌고 동료들과 선배들, 후배들은 육아휴직을 마치고도 무사히 회사에 복귀했다. 물론 나름의 고충들을 겪고 있지만 이런저런 방법으로 잘 돌파하고 중간관리자급으로의 승진을 앞두고 있는 케이스도 많다.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우리 회사(물론 규모가 크지는 않다)에 나랑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 중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직원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차는 부장급을 빼곤 내가 가장 높은 상황이다. 이상하네, 내 주변엔 육아나 결혼을 이유로 일을 그만둔 사람은 없는데. 다 어디로 간걸까? 나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 거겠지?


십수년의 경력이 염치없을 정도로 나는 솔직히 현재의 직업이 '천직'이라거나,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적이 없다. 우리 업계는 난감하게도 개인별 능력치와 실적이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편(이라고 생각하는)인데, 동료들과 비교해도 나는 딱히 잘 하는 축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나와 같이 수습생활을 했던 동기들 중 상당수는 현재 나보다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예 이 업계를 떠나 다른 업계에서 인정받는 이들도 있다. (물론 잘 되지 않은 케이스는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감안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나는 이 직업 특유의 경쟁적인 분위기가 맞지 않아서 점점 더 경쟁이 덜한 부서나 직장으로 옮겨 왔다. 경쟁을 좋아하는 분들의 입장에선 '밀려난'걸로 볼 수도 있겠다(틀린 말은 아니다). 운이 좋아서 연봉은 그다지 깎이지 않고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해 와서 먹고사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지만, 아무튼 커리어 측면에서는 승자라고 보기 어렵다.

재작년에 책을 내고 한 매체의 기자분이 브런치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내 책을 읽고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초보 저자로서 얼떨떨한 마음 반, 감사한 마음에 답장을 드렸는데, 내가 속한 직장이 어디인지 밝히자 그 기자분의 연락이 끊겼다. 아마도 워킹맘을 소재로 쓴 책인데 '워킹'의 커리어가 좀 빈약하다고 판단하셨던게 아닐까 싶다(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유퀴즈에 나와서 인터뷰를 할 정도의 커리어는 못 가졌지만, 그래도 한 푼 없이 집에서 맨몸으로 나와 내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릴 정도는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이 해나갈 정도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자립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회사에 남아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워커홀릭 커리어우먼의 자신감 넘치는 회고도, 회사 밖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실력자의 글도 아니다. 나는 사회 초년생시절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엄청난 능력자 선배들같지도 못하고, 슈퍼우먼과도 거리가 멀고, 여전히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그래도 어쨌든 별 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론 워킹맘의 진짜 위기라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를 아직 겪어보지 못한 만큼(요즘 진짜 위기는 고학년 부터라는 말도 있다) 앞날까지는 장담을 못 하겠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황량한 눈밭에, 조그만 발자국을 내며 혼자 걷고 있는 허약한 새 한마리처럼 내가 갈 길을 내가 만들면서 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내 힘으로 번 돈으로 내가 갖고 싶은 것들, 내 취향이 반영된 것들을 사모으거나 소비한다. 그런 방법이 제법 나는 나답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장 나답게 살고 있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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