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게 뭔데?"
요즘 엄마들이 심심치 않게 듣는 말 중 하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그냥 엄마로만 살지 말고 자아를 찾아야 한다', '나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윗세대의 경우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하던 일도 접고 엄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할 것을 강요받았다면, 우리 세대는 오히려 결혼 전의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마치 의무처럼 권장되고 있다. 아이를 낳아도 엄마로서의 역할만이 아닌, '나다움'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그래서일까. 많은 엄마들은 어린 아기를 눈물을 머금고 맡기고라도 직장생활을 지속하고, 학위를 따고, 취미생활을 하고, 산후조리가 끝나기도 전부터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혹독한 다이어트를 한다. 전형적인 아줌마 몸매가 되지 않기 위해. 심지어 만삭 임산부도 연예인처럼 배만 나온 D라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다운 건 뭘까. 이런 말들을 들으면 난 드라마 클리셰의 대사처럼 "나다운 게 뭔데?"라고 묻고 싶어진다. 엄마로서 사는 건 나답지 못한 일이고, 직장에 다니며 '자아실현'을 하는 것은 나다운 일일까? 한국 직장은 얼마나 직원들의 자아실현에 기여하는가?
내 경우에는 7년여간 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음을 실감하고, 하고싶은 일보다는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주로 해야 할 때마다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회사의 이익을, 더 정확히 말하면 오너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고용된 부속품일 뿐이며 회사는 자아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내 노동력을 활용하는 곳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물론 그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직장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자기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일이 늘 재미있고, 자아가 실현되는 느낌을 매 순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부럽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미혼으로서 자신에만 집중했던 시기와 달리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엄마로서의 새로운 삶을 사는 건 나다움을 잃은 걸까? 한 사람의 탄생부터 성장과정을 함께하며 정서적 신체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엄마로서의 일은 직장생활만도 못한 일일 뿐일까?
우리는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친구로서, 직장 동료로서, 상사로서, 시민으로서, 개인으로서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나일뿐 고정된 자아정체성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가장 알맞은 모습을 택할 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닌 이상 자아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아는 넓어지는 것이다.
직장을 잠시 쉬면서 전업으로 아이와 가족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엄마로서의 역할에만 함몰되지 말고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얼핏 보기에는 엄마의 행복을 위해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말은 일견 엄마의 돌봄노동을 다른 노동에 비해 낮게 평가하는 시선이 깔린 듯하다. 더군다나 젊은 엄마들이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미 나이든 양가 어머니들을 또다시 돌봄노동에 당연스럽게 희생시키는 현상에 대해서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조부모님들이야말로 이제는 진짜 자아를 위해 자기 시간을 갖고 싶지 않을까?
여전히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육아에 지친 엄마들을 위해 무상으로 보육을 해주고, 일터로 빨리 복귀하게 도와주고,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는 것도 물론 좋지만, 여전히 많은 엄마들은 내 손으로 아기를 키우고 싶어한다. 출산율이 낮은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돌봄노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엄마들에게 왜 그러고 있냐고, 얼른 살을 빼고 출근하고 네 자아를 찾으라고 압박하기 전에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분히 자부심을 갖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