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5
출산 전부터 숱하게 들어온 말 중에 "육아는 템빨"이 있었다. 내 경우 육아를 하면서 '템빨'에 감격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약빨'의 도움은 정말 많이 받았다. 사실상 내 육아를 도와 준 일등공신은 각종 육아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육아꿀팁도 아닌 바로 항불안제와 항우울제였다. 너무 병적으로 보인다고? 하지만 약을 먹기 전의 나와 약을 먹기 시작한 나의 아기에 대한 태도는 후자가 훨씬 더 건강했다. 우리 가정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 오는 듯했다.
첫 날, 아침에 일어나 항불안제를 먹었다. 기분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몸이 나른한 느낌이 들면서 각종 감각에 다소 무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짜증을 내도 그냥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아기가 보는 앞에서 한 번도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랑 단둘이 있는 시간이 두렵다는 느낌도 덜해졌다. 조금 더 지나자 현 상태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태도가 생겼다.
약을 먹은 지 열흘째가 된 날, 출산 이후 처음으로 아이를 낳은 게 그렇게 후회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했다. 나는 출산을 후회하는 입장이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 하에서 내린 생각인 줄 알았는데, 그냥 우울증으로 인한 병적인 사고일 뿐이었다니. 물론 여전히 육아가 즐겁지는 않아도, 아직도 출산 전의 편안한 일상과 자유로운 밤 산책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이 또한 '호르몬의 장난질'이라고 생각하면 예전처럼 한없이 땅굴을 파고 내려가 극단적인 생각이 들지 않고 마음이 금새 안정됐다.
약 외에도 개인적인 변화 요인도 있었다. 바로 신혼집이었던 12평 언덕 위 작은 빌라를 벗어나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다. 원래 연말까지가 전세 계약 기간이었으나 때마침 입주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우리 부부는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이사를 계획했다. 아기를 키우기엔 너무나 힘든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20평 아파트라 여전히 좁은 감은 있어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살 만했다. 햇볕이 잘 들고 대체로 조용하며, 무엇보다 주변에 녹지 공간이 잘 조성돼 있어 유모차를 끌고 나가기 좋았다. 이전에는 커다란 디럭스형 유모차를 겨우겨우 끌고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공원이 나왔는데 이제는 도보 5분 거리에 공원이 있으니, 간단한 휴대형 유모차로도 산책이 가능했다.
나는 그제서야 왜 많은 사람들이 신혼집으로 아파트를 고집하는지, 특히 아기가 생기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30평대 이상의 신도시 아파트로 대출을 영끌해서라도 옮기는지 납득이 갔다. 심지어 '당근마켓'으로 유아용품 거래를 해도 모두 거래 상대자들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빌라면 어떠냐, 무리해서 아파트 대출 갚으며 하우스푸어로 사느니 적당한 크기의 집에서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기가 생기고 나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일단 어마어마한 아기용품을 놓는데만 해도 일정 이상의 공간이 필요했으며 아기의 정상적인 발달과 산모의 건강에 필수적인 편의시설, 병원, 마트(지금은 코로나 시국으로 어렵지만 문화센터는 아기와 엄마의 거의 유일한 나들이 장소다) 등을 도보 이동 가능한 곳에 갖춘 곳이 아니라면 육아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새삼 우리나라는 부동산 문제가 선결되지 않는 한 저출산 해결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사를 왔을 땐 마침 날씨 좋은 가을날이어서 나는 매일같이 아기를 데리고 공원을 걷다 들어왔다. 낙엽이 곱게 든 가을 공원에서 아기를 데리고 벤치에 앉아 있으니 휴직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일 집에서 똑같은 일상만 반복하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도 보고, 강아지들도 보고, 매일 조금씩 바뀌는 자연 풍경도 보니 아기의 정서에도 좋을 것 같았다.
아기 역시 8개월을 넘어서니 스스로 앉기 시작하면서 엄마를 찾는 빈도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잠시 내 할 일을 하고 있어도 거실에서 사부작사부작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했다. 대신 혼자 움직이면서 아무거나 입에 넣거나 여기저기 부딪힐 수 있어 눈을 아예 뗄 수는 없었지만. 낮잠 패턴도 어느정도 잡혀서 하루에 30분~1시간 정도는 숨을 돌리게 됐다.
그 뒤로도 3주에 한 번 꼴로 병원을 찾아 그때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약을 늘리거나 줄였다. 밤잠이 잘 오지 않을 때는 취침약을 늘리기도 했다. 그렇게 석달여가 지났다. 이제 울거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증상은 거의 없어졌다. 의사 선생님께 말하니 이렇게 제안했다. "그럼, 이제 낮약을 끊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