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6
그렇게 처음으로 취침약만을 처방받아 귀가했다. 왠일로 약봉투가 홀쭉했다. 조만간 약을 끊고 우울증의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도 보였다.
사실, 처음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먹은 뒤 '너무 효과가 좋아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이러다 평생 약을 먹어야 되면 어떡하죠?" 하지만 선생님은 내 상태를 보아하니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고, 만약 오래 갈 것 같으면 집 근처 병원으로 전원을 권고했을텐데 굳이 이 병원을 다니라고 한 이유는 오래갈 정도가 아니어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다른 우울증 투병인들의 후기를 보면 내가 먹는 약의 함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기도 했다.
초반 몇 주는 낮약을 먹지 않고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기가 짜증을 내며 밥을 거부하면 마치 '연기를 하듯' 친절한 목소리로 아기를 달래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싸움이 날라치면 일단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고 아기와 눈이 마주치면 억지로라도 웃었다. 괜히 굳은 분위기에서 아기에게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기들은 엄마의 표정을 모방한다고 한다. 아기와 눈만 마주치면 기분이 좋든, 나쁘든 일단 미소를 지어주려고 한 덕분인지 몰라도 아기는 지금 무척이나 잘 웃는 편이다.
그러나 위기는 곧 찾아왔다. 어느 날 이상하리만큼 몸이 무겁고 짜증이 계속 났다. 참아보려 해도 쓰레기를 꾸역꾸역 밀어넣은 쓰레기통처럼 짜증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아기가 이유식을 바닥에 집어 던지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캘린더를 확인해보고 바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생리 전 증후군(PMS) 기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때마침 남편이 생일 선물로 받은 랍스터와 조개를 요리한다고 주방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어 아기의 목욕시간까지 늦어지자 불같이 화가 났다. 나는 아기 앞에서 화를 벌컥 내기 직전, 나는 '만약 힘들면 먹어도 된다'고 했던, 지난 번 처방때 받아놨던 아침약을 뒤늦게 삼켰다.
아기가 없었다면 그냥 말다툼 하고 끝날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아기가 보는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거나 큰 소리가 나는 건 안될 일이었다. 부부싸움을 목격한 아이들은 마치 전쟁터에 있는 것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어린 시절이 그랬으니까. 만성적인 가정불화와 욕설이 오가는 심한 부모님의 싸움을 매일같이 지켜봤던 나는 위축된 어린시절을 보냈고, 그것을 자가치유하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다. 절대로 내 아이에게 그런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낮약을 다시 먹고 사태는 약간 진정됐지만 좌절스러웠다. 결국 나는 약의 힘이 아닌 내 힘만으로는 육아를 온전히 할 수 없는 수준인가. 그래도 일단 아기 앞에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먼저이므로 별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몇주간 아침약 끊기를 시도했으나 불현듯 예전처럼 육아를 하고 있는 내 신세를 비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다는 두려움이 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진료 때 상태가 안 좋아졌음을 하소연하고 다시 아침약을 받아왔다. 대신 취침약을 좀 줄이기로 했다.
(다음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