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8
"뭘 할 때 즐거우세요?"
진료 때, 낮약을 먹지 않으니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는 내게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내 머릿속엔 여러가지가 떠올랐다. 사실 아기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마트폰으로 웹서핑을 하거나 SNS를 하는 정도밖에는 없었다. 며칠 전 아기가 노는 옆에서 육아서를 보려고 했으나 아기가 발견하고 냅다 기어와 육아서를 입에 넣는 바람에 독서도 강제 중단됐다.
"그냥...책도 보려고 하는데 아기가 방해를 해서 볼 수가 없네요."
"아기가 방해하더라도 틈틈히 해야죠. 아기가 책을 좋아하면 좋은 거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하세요."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뭐가 있을까 골똘이 생각했다. 무엇이 내 기분을 좋게 할까. '아기의 방해'를 적게 받으면서도.
아기를 막 낳아서 신생아를 돌보고 있을 때, 나는 SNS에서 이유식을 손수 만드는 엄마들을 보며 놀라움과 함께 '나는 절대로 저렇겐 못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장 내 입에 밥 넣을 시간도 없을 판인데 이유식을 만들다니? 당연히 이유식은 사서 먹이고 그 시간에 아기와 상호작용을 더 하거나 내 밀린 수면을 보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기가 5개월이 되고, 막상 이유식을 시작하려니 '이렇게 작은 아기에게 어떻게 아무거나 먹일 수 있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막상 아기는 웬만한 돌쟁이보다 덩치가 클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는 난생 처음으로 집근처 생협에 조합원 가입을 했고 이유식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나는 이유식을 만드는 일이 그렇게 괴롭진 않았다. 사람의 재능과 흥미란 정말 제각각이란 생각이 드는게, 누군가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한가 하면 요리라면 끔찍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반면 나는 육아는 너무 힘들었지만 이유식 식단을 짜고, 재료를 구입하고, 만드는 일이 조금 재밌기까지 했다. 과정샷을 블로그에 올리면 나름의 기록도 되고 그래도 '여러모로 부족한 엄마지만 그래도 내 깜냥 안에서 뭔가 해주고 있다'는 자기만족도 있었다. 아기도 다행히 먹성이 좋아서, 10개월이 넘어 자기 손으로 장난을 치고 싶어하는 시기 전까지는 뭘 해 줘도 대체로 잘 먹었다. 때마침 우리 집에 찾아왔던 양육 전문가도 이유식은 왠만하면 해서 먹이는 게 좋다고 해서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내가 육아를 워낙 힘들어하니, 남편 포함 주변에서는 차라리 이유식이라도 사 먹이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육아를 힘들어한 이유는 아기의 잦은 밤잠 설침과 24시간 내내 붙어 있어 내 시간이 없다는 답답함이 주된 이유였지 이유식 만들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도 이유식 만들기를 좋아한다면 계속 해도 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유식을 만들기 때문에 산모도 잘 챙겨먹게 된다는 이점도 있다고. 실제로 나와 남편은 이유식을 만들고 나서부터 남은 재료를 소진하기 위해 다양한 반찬을 해먹게 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배달음식과 냉동식품을 섭렵 중이었을 것이다.
이유식 만들기 외에는 또 뭐가 있을까.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아기에게 두 돌까지 미디어 노출을 하지 않겠다는 나와 남편의 결심 때문이기도 하고, 남편은 이왕 TV를 살 거면 큰 사이즈로 놓고 싶은데 우리 집에는 그럴 공간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나와 아기는 단 1분도 영상을 보지 않고 하루를 보내야 한다. 대신에 인공지능 스피커로 항상 음악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예전에는 아기가 좋아할 것 같아서 동요를 틀었는데, 생각보다 아기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아기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이 워낙 여러가지 소리가 나서 그것까지 듣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나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육아를 한다. 사실 심하게 자극적이거나 불건전한(?) 음악이 아니라면 아기에게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다. 90년대 가요도 틀고 인디밴드 음악도 틀고 외국 음악도 틀고 클래식도 틀었다가 재즈도 틀었다가. 아기는 흥이 없는 성격인지 별 관심은 안 보인다. 대신에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기를 보면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음악을 틀어놓고 아기에게 책도 읽어주고 가끔 촉감놀이도 시켜주고 밥도 먹이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게 한다. 그리고 정말 할 게 없을 땐 내 취향의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아기랑 춤을 추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가 웃으면서 즐거워하면 아기도 뭣도 모른 채 같이 깔깔거린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당연히 육아 스트레스를 근본적으로 제거해주진 못한다. 일종의 진통제나 영양제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나도 그렇고, 많은 육아 선배 엄마들도 그렇고, 심지어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결론은 같다. "아기가 클 때까지는 그냥 견뎌내야 한다. 아기가 크면 나아지니까." 단지 아기가 클 때까지의 그 힘든 시간을 다양한 방법으로 이겨내고 있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