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9
출산을 앞두고 있던 2019년 연말, 대형 서점에 들렀다. 언제나처럼 새해를 맞이하는 다이어리들이 눈에 띄었다. 한 권을 집어 드니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돼 있었다. '내가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문득 나의 '내년'을 떠올려봤다. 새해를 맞이하자마자 출산을 하러 갈 거고, 아이와 함께하는 해는 보나마나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일 년을 통째로 육아휴직을 내 오롯이 육아에만 투자할 계획이니까. 다이어리를 보고 있는 게 무의미해져서 바로 서점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커피를 자주 사 마시는 탓에 매년 받게 되는 카페 체인의 '프리퀀시 사은품'으로, 나는 처음으로 다이어리가 아닌 다른 것을 골랐다. 어차피 다이어리가 생겨 봤자 제대로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에.
일 년 남짓 지난 지금 그 때의 예상은 '적중했다'. 만약 그 때 평소처럼 다이어리를 받았다면, 글쎄, 한 페이지나 제대로 썼을까? 요즘 같으면 아마 내가 다이어리를 꾸미려고 펜을 드는 순간 아기가 기어와서 냅다 뺏어 입에 물고 다이어리는 찢어 버렸을 것이다.
임신을 하기 전 나는 '계획 강박'이 있다 싶을 정도로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성취를 한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채식을 한다든지, 다이어트를 하거나 운동을 조금씩 하거나, 아니면 책을 좀 더 읽어보거나 등등. 이제까지 안 해 봤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아기는 그런 계획의 상당수를 최소 5년 후, 길게는 30년 후까지 미뤄버렸다. 30년 후에는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사실상 무기한 연기라고 봐도 될 것이다. 임신했을 때부터 이 사실은 나를 꽤나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장 즐기는 일 중 하나를 상당히 오랫동안(어쩌면 영영) 못하게 된다는 거니까. 다이어리를 구입하지 못했던 날, 처음으로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우울증의 시작도 아마도 거기서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내 인생을 더 이상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자각.
아이를 막 낳고 몇 개월 간은 그런 것에 우울을 느끼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자아가 뭐고 계획이 뭐야, 당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때 해결이 불가능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화장실도 제때 못 가고, 심지어 모유양이 턱없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분유 혼합 수유를 하니 2시간에 한 번씩 물려야 하는 젖병이 동나 설거지는 해야 하는데 아기는 울고 있고. 그런가 하면 밤에는 내내 뜬눈에 어쩌다 재워도 계속 끙끙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전쟁포로를 고문하는 방법 중에 잠을 안 재우는 방법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지금 전쟁포로 혹은 그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구나.
10여년간의 사회생활을 하며 숱한 회사들을 다니고 '볼꼴 못 볼꼴'을 다 겪어봤는데도 불구, 내가 재직중인 '육아'라는 직장만큼 근무환경이 혹독한 곳은 없었다. 아무리 밥먹듯이 야근을 시키는 회사라도 매일같이 날밤을 새야 한 적은 없었고, 연차조차 없는 회사여도 주말에는 쉴 수 있었고, 더군다나 밥도 못 먹게 하는 회사라니. 악덕기업도 이런 악덕기업이 없었다. 게다가 일반 직장이라면 날 힘들게 하는 '상사'를 욕하면서 스트레스라도 해소할텐데 육아는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오히려 내 새끼가 날 힘들게 하면 모든 게 다 내 탓인 것만 같아 죄책감에 더 잠을 못 이루는 게 엄마의 삶이다. 실제로 나는 육아를 시작하고 첫 6개월 정도는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아이 정서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의식적으로 줄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리 많이 하지 않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적인 조건은, '퇴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직장생활도 가슴에 사표 한 장 품었다고 생각하면 며칠간은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나가면 니들이 손해지 뭐, 하면서 정신승리라도 했다. 하지만 육아를 퇴사하다니? 아이를 버린 비정한 어미로 살고 싶지 않은 한 그것은 이번 생에 불가능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육아우울이 극에 달했을 때 아예 인생에서 로그아웃해버리는 방법을 많이도 고민했었다.
어쨌거나 나는 병원에서 '산후우울증' 진단을 받고 그에 따른 약물처방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순전히 산후 호르몬에 따른 우울감이었나 싶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굳이 임신출산을 겪지 않았더라도, 성별을 불문하고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도 24시간 내내 휴식시간이 전혀 없이 자신의 의지가 모조리 박탈당한 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만을 돌보며 살아야 한다면, 심지어 잠과 식사, 용변조차 제때 볼 수 없다면 미치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일 아닌가? 실제로 육아휴직을 내고 육아를 전담하는 아빠들 또한 비슷한 우울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들은 임신출산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면 호르몬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사람들은 흔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사회 인식 상의 '모성'에 부합하지 않는 감정을 토로하면 '산후우울증' 탓이라고 성급하게 진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육아가 너무 힘들다든지, 행복하지 않다든지, 아이가 그리 예쁘지 않다든지 등등. 사실 어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인데(물론 그것을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티내거나 부모로서의 기본적인 의무를 방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감정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것 같다.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직장인으로서 실격이고 비난받아 마땅한가? 정신 질환인가? 반면 누군가가 엄마됨의 고충을 얘기하려치면, 감히 비전문가이면서도 "호르몬 때문"이라고 입을 막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질병으로서의 산후우울증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연구돼야 할 것이다. 사실 산후우울증조차 제대로 인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없이 자애롭고 아이에게 희생하는 데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너 그거 정신병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경솔하고 폭력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