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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끊겠다는 조급증을 버리다

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10

by 뚜벅초


아이가 돌쯤이 되면 약을 끊을 수 있을 거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나의 우울 증상은 나아질 듯 하면서도 완쾌되질 않았다. 조금 괜찮은 것 같다가도 컨디션이 안 좋아지거나 아기가 심하게 떼를 쓰는 날에는 어김없이 분노가 과하게 치밀었고 내 삶이 실패작인 것처럼 느껴졌다. 낮약을 절반만 먹다가도 결국 한 알을 모두 삼켜버릴 때가 늘었다.


무엇보다 나를 답답하고 우울하게 하는 것은 출산 전과 달리 내 삶의 '옵션'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화가 난다고 훌쩍 떠나버리거나 남편과 소리높여 싸우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라고 맘껏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언제나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려 노력해야 했고, 그러려면 나의 인내가 필수적이었다. 더군다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의 불화 속에서 만성 불안을 앓으며 지내온 나로서는 그것이 더 절실했다. 아이 앞에선 절대로 부부싸움 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라는 임신 때의 굳은 결심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때로는 약으로도 분노와 짜증을 막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남편 모두 쉬는 시간이 거의 없이 극한의 노동량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Gundula Vogel님의 이미지 입니다.


물론 언제나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아기의 컨디션이 좋아서 혼자서도 잘 놀거나, 내 몸 상태가 좋거나 하는 날에는 약 없이도 하루를 견딜 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을 아예 끊어버리면 며칠 되지 않아 우울사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문득 이러다가 '평생' 우울을 짊어지고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대개 정신과 질환은 아무리 짧아도 6개월, 통상 1년 이상 장기적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대다수인 듯했다. 다행히 나는 먹는 약의 양으로 볼 때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 약이나마 먹지 않으면 아기에게 화를 내게 될까봐 두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만약 내가 육아를 하지 않는다면, 아니 적어도 주양육자가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약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몸이 좋지 않아서 남편이 아이를 보고 한나절 방에서 쉰 날도 있었는데, 평소 아기를 혼자 보는 날에는 그렇게도 위태롭던 내 감정선이 더없이 평안했다. 그 날은 낮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난 이미 엄마가 되어버렸고, 엄마가 된 이상 육아는 내 몫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바꿀 수 없는 내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춰 사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어쩌면 우울은 내가 육아를 하는 한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다.


나는 당장 약을 끊어야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컨디션을 보며 천천히 약을 줄였다 늘려가며 내 마음을 살피기로 했다.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컨디션이 좋을 땐 좀 더 의욕을 내서 집안일을 하고, 좋지 않을 땐 최소한의 일만 하고 육아에만 집중한 뒤 아기가 잠들면 얼른 쉬거나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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