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12
20대 시절, 나의 좌우명 중 하나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였다. 그만큼 난 '계획성애자'라고 할 만큼 목표를 수립하고 계획대로 차근차근 이뤄나가는 걸 좋아했다.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계획이 흐트러지면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그렇게 계획대로 살아야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될 것 같았고, 계획대로 살지 못하면 망한 인생이 되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오만한 마음이었다.
육아를 하면서,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살려는 습관'을 버리게 됐다. 일단 내 일상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기의 컨디션에 철저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애초에 내 의지대로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내 의지대로 뭔가를 하려고 고집을 부리면 결국 그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짜증을 내게 되고 말았다. 한때는 육아 우울감 극복을 위해 아기가 자는 밤 시간에는 나를 위한 취미생활을 하려고 맘먹기도 했었다. 책도 읽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이것저것 해 봐야지. 하지만 아기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 어쩌다 잠이 든다 해도 금새 울며 엄마를 찾았다. 내 리듬은 깨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애꿎은 아기에게 성질을 내게 되느니 나는 애초부터 출산 전처럼 촘촘한 계획을 짜는 습관을 버렸다. '되면 하고, 안 되면 말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더군다나 아기와 함께한 첫 해는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은 시기였다. 일반인들조차 평범한 일상을 살지 못하고 매일같이 확진자 수 통계를 초조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여행, 가족과 지인 모임 등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일생에 한번뿐인 신혼여행을 미뤄야 하는 부부들도 많았다.
육아중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면에서는 정기적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나, 갓 성인이 돼 꿈에 부풀어 있을 젊은이들에 비하면 '집콕'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육아우울증이 심해지니 집콕이 너무 괴로웠다. 우울증 환자에게 일정 이상의 야외활동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돌이 안 된 아기를 양육 중인데다 코로나 확산세가 심각할 땐 하루에 한 번 외출조차 쉽지 않았다.
때마침 남편 직장의 복지포인트를 이용해 근교 호텔에서 아기와 함께 호캉스를 할 수 있게 됐다. 코로나 확산세가 다소 꺾이던 늦봄 무렵, 남편에게 그 소식을 듣고 여름 휴가로 갈 일정을 예약했다. 이때쯤이면 코로나도 완전히 잠잠해졌을거야, 라고 생각하고. 아기가 제법 자라 7개월 무렵이 됐으니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베이비 카페 수영장도 예약했다. 모처럼만에 아기와의 새로운 추억을 쌓을 생각에 내가 더 설렜다. 육아휴직을 하느라 얼굴도 못 본 친한 직장동료들과의 약속도 잡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육아일상을, 휴가만 기다리며 견뎠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광복절 집회'로 인해 코로나 확진자는 다시 무서운 기세로 늘어났고,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모든 일정을 다 취소하고 말았다.
전국민이 '코로나 블루'를 겪은 시기였지만, 안 그래도 '블루'였던 나는 '블랙' 수준의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정말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 그 와중에도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여기저기 놀러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감과 우울감이 더 깊게 찾아왔다. 모두가 조심하는 시기였지만 영유아를 양육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여름부터 시작된 코로나 확산세는 가을쯤에 들어 잠시 주춤해졌고, 그 틈을 타서 뒤늦게 호캉스와 베이비카페를 다니며 외출을 시작했고 병원 치료도 꾸준히 받으며 내 우울감도 잠시 회복되는 듯했다. 하지만 겨울철부터 다시 확진자수가 네자릿수까지 치솟기 시작했고 나는 또다시 거의 1년만에 만날 지인들과의 약속, 복직 전 마지막 '버킷리스트'로 기대하고 있었던 아기와의 문화센터 수업도 갈 수 없게 됐다. 잠잠해졌던 우울감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한참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아기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조바심까지 더해져 혹여나 아이의 발달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까지 더해졌다.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내가 느끼는 불안감과 우울감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물론 사랑하는 아기에게 최대한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미안함과 답답함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내 계획'에 따라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데서 온 좌절감이 아닐까? 막상 아직 말도 못 하고 엄마, 아빠가 가장 좋은 친구인 우리 아기가 딱히 어디를 가고 싶어한 건 아니다. 나는 육아 또한 '내 생각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보면 육아 자체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아기는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른의 계획이나 욕심대로 뭔가를 진행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아기 돌을 한 달여 앞두고 돌 기념 스튜디오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처음 찍는 가족사진이라 출장 미용사를 불러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받고 '가족티'까지 맞춰 입었다. 결혼식 이후 처음 받은 메이크업에 내가 더 들떴지만, 아기는 오히려 화장을 한 내 얼굴을 못알아보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도 오열을 하는 통에 제대로 사진도 거의 찍지 못하고 다음 일정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받은 메이크업 비용 10만원을 공중에 날린 셈이다. 어이가 없어하는 내게 스튜디오 직원은 "요즘 코로나 때문에 아기들 낯가림이 다 심해졌어요. 다들 두돌까지 재촬영할 각오 하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웨딩사진도 찍고, 신혼여행 스냅 사진도 찍었지만, 아기가 없었던 탓에 이런 '사태'는 아예 예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 집에나 있는 법한 활짝 웃는 예쁜 아기의 연출사진 하나 찍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거였다니. 하기사 아기에게 낯선 스튜디오와 사람들, 무서운 카메라와 불편한 돌복은 그냥 울음을 유발하는 것들일 뿐일게다.
그 후로 내 좌우명은 바뀌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면 좋겠지만, 사는 대로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보다 그리 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고. 그게 나 아닌 다른 존재,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어쩌면 우리 아기는 지금껏 나만 옳다고 생각해왔던, 어리고 오만했던 내게 여유를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