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7
"여보, 그냥 빨리 회사 나가고 내가 대신 휴직할까?"
내가 육아의 고통을 매번 호소하자 남편이 말했다. 원래 우리 부부는 아기 출산 전부터 내가 출산휴가 포함 1년 3개월의 휴직을, 바로 이어서 남편이 1년의 육아휴직을 내서 아기를 두 돌까지는 가정보육을 한 뒤 어린이집에 맡긴다는 계획이었다.
만약 남편의 말대로 내가 조기복직을 하고 남편이 대신 휴직을 하면, 아기는 예정보다 6개월 정도 빠른 약 18개월에 어린이집을 가게 된다. 사실 맞벌이 가정에서는 돌만 지나도 아이를 기관에 맡기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임신 때부터 '애착육아'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 온 입장에서는 영 내키지 않았다. 사실 많은 전문가들은 최소 36개월까지는 가정보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건상 그건 어려워서 그나마 두 돌로 타협한 거니까. 그래도 두 돌쯤 되면 스스로 밥을 먹고, 간단한 의사소통도 하고, 배변 훈련도 슬슬 시작할 수 있을 때라 그나마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사실, 내게 육아는 '산 넘어 산'일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힘들다는 이유로 복직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일단 나는 일에 큰 욕심과 흥미가 없었고, 육아휴직을 길게 낸 것도 잠시 일에서 떠나 있으면서 다른 진로를 모색해볼까 하는 심사도 있었다(물론 밤잠조차 수시로 깨는 아기의 보초를 서느라 진로 탐색은 물건너갔지만). 이런 상황에서 단지 육아를 '피하기' 위해 복직을 해봤자 스트레스만 가중될 것 같았다. 게다가 워킹맘의 삶이란, 일에서 퇴근하면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게 아닌가? 어차피 육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상담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일이 너무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기 복직은 답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이 이번에는 다른 제안을 했다. "잠깐이라도 어린이집에 맡기는 건 어때? 아니면 시터를 쓰든지."
인터넷을 찾아보니 실제로 나처럼 심한 육아우울증을 겪는 많은 엄마들이 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출산 전만 해도, 돌도 안 된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겪어 보니 엄마의 정신건강이 심하게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아기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될 수 있으니 오전 잠깐이라도 기관에 맡긴 뒤 좀 더 나은 컨디션으로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물론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초중고생들조차 원격수업을 하고, 어른들도 재택근무를 하는 마당에 어린 아기를 기관에 맡기는 건 도무지 내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나는 단박에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마음과 몸이 극도로 지친 날, 아기에게 짜증스럽게 대꾸를 한 날에는 내가 과연 맞는 선택을 한 것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게 아닐까? 엄마 자격 없는 내가 굳이 애착육아를 한답시고 아이를 끼고 있는 것보다 기관에 잠시라도 보내는 게 아이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사실 내가 빠른 기관행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역시 어린 시절 기관 생활이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불안이 높고 내성적이며 사회성이 낮은 편이었다. 그 때문에 항상 기관에서는 센 아이들에게 치이고 겉돌기 일쑤였다. 아침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렸던 생각이 난다. 더 어릴 때는 외갓집에서 지냈는데, 언제나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할머니를 조르고, 엄마 냄새가 밴 옷과 베개에 코를 박고 잠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우리 아기는 나와는 엄연히 다른 인격체기 때문에 나와 꼭같은 경험을 하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기를 키우면서 지켜본 바로는, 아직 어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백일 무렵부터 낯을 심하게 가리기 시작할 정도로 아주 둔감한 성격은 아니어 보였다. 베이비카페에 가도 활달한 아기들은 우리 아기를 보며 먼저 다가와 놀자고 하는데, 우리 아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울곤 했다. 문화센터 수업에 가도 유일하게 울음을 터트린 아기는 우리 아기였다. 물론 낯익은 사람들 혹은 일정 거리를 지켜주는 사람들에게는 잘 웃고 옹알이로 말도 걸지만 갑작스럽게 다가오거나 너무 낯선 환경에서는 겁을 심하게 먹곤 했다. 나처럼 기관 생활을 즐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더군다나 돌 이전 아기들은 기관생활을 하는 즉시 각종 전염병을 돌려가며 앓는다고 하니 이 역시 내키지 않았다. 우리 아기는 키와 몸무게 모두 평균 이상이고, 돌 무렵인 현재까지 열 한 번 난 적 없이 꽤 건강하게 자라왔지만 기관을 다닌다면 이런 상태를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심지어 전대미문의 판데믹 시국이 아닌가. 다니던 기관이라도 퇴소를 고려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나는 아직 어린 아기를 두고 '모험'을 하느니, 어른인 내가 좀 더 약을 먹고 버텨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어린 시절 일로 바빴던 엄마와 가정에 무관심했던 아빠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황야에 내던져진 듯한 마음을 항상 안고 살았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나랑 눈이 꼭 닮은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내가 널 지켜주겠다고. 내가 좀 아프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