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낳았다고 다 되는 건 아니더라
임신을 확인했던 날, 나는 그리 계획에 없던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온 아기에 놀라 늦은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가장 깊게 든 고민은 '내가 과연 한없이 희생만 해야 한다는 엄마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질문에 '일단 낳으면 다 하게 돼있다'고들 격려했다. 막상 낳아 보니, 과연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저절로 하게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일단 낳은' 뒤 '다 하게 되는 것'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인내, 기존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과정이 함축돼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추상적으로만 말하고 인식할 뿐, 누구도 자세히 알리지 않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단 낳으면 희생적인 어머니가 저절로 된다'기 보단 '희생적인 어머니가 되지 않으면 아이를 키울 수조차 없다'가 더 사실에 가까웠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정말 이것이 인간이 맞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작고 무력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양이들만 해도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스스로 밥을 먹고 용변을 가리는데, 사람 아기는 태어난 지 수 년간 스스로 밥을 먹고, 용변을 보고, 옷을 입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하다. 심지어 걷는 것조차 거의 일 년이 걸리니까. 이는 아기가 그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정상적으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본적인 생활을 주양육자가 대신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역할은 임신출산을 겪고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의 엄마가 하게 된다.
'엄마가 되면 내 시간이 없어진다'는 말은 숱하게 들어 왔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단 1분'도 내기 힘든 수준임은 짐작하지 못했다. 아기가 어리면 어린 대로, 좀 자라면 자란 대로 눈을 뗄 수 없으며 밥도 편히 먹지 못하고, 밤잠을 잘 들지 못하는 아이는 수시로 엄마를 찾는다. 실제로 육아를 하느라 심한 수면장애가 생겨 아이를 다 키우고도 병원 치료를 받는 엄마들을 다수 봤다. 아기를 돌보는 일은 내가 심하게 아파도, 극도로 우울한 날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1년여간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서러웠던 때는 바로 내가 아플 때였다. 말 그대로 엄마는 맘대로 아플 수도 없었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면 자유가 찾아온다고? 몸의 자유는 어느정도 확보될지 모르겠지만, 자식의 굴레란 부모의 관뚜껑이 닫히는 날까지 계속되는 게 아닐까. 특히 요즘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30~40대가 되도록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해 사는 '캥거루족'들도 흔하다. 이들의 60~70대 부모는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종사하며 자녀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높은 노인 빈곤율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고백하자면 난 아이를 낳기 전까지 '딩크족'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편이었다. 물론 실제로 딩크를 선택한 지인들의 입장은 존중했지만, 만약 나에게 딩크로 살라면 '굳이 결혼을 왜 하나'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됨의 무게를 몸소 체험해 보니 새삼 딩크의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은 난 이제서야 뒤늦게 깨달은 걸, 아이를 낳지 않고도 일찌감치 알고 현명한 선택을 한 딩크족들이 대단하고 부럽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아이를 낳고 그 쓴맛과 단맛을 모두 경험했으면서 다른 딩크족들에게 '그래도 아이는 하나 낳아야 한다'고 간섭하는 이들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도 부모됨의 무게를 익히 알 텐데, 함부로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될 성격의 문제임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지 않나?
또 하나 새롭게 깨달은 것은 엄마가 된 이상 나의 발전보다 아이의 성장이 몇 배는 더 큰 행복을 준다는 점이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자녀 교육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스트레스를 받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저럴 돈과 정성으로 본인이 공부를 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보니, 그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내가 인정받는 것보다 내 아이의 성장이 몇 배는 더 기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우울한 날이었어도, 아기가 처음 뒤집기를 해낸 날이나 첫니가 난 날은 갑자기 모든 우울감이 사라졌다. 하물며 어린 아기의 당연한 발달에도 이러한데, 아이가 학업에 두각을 드러내 전교 몇 등을 하거나 명문대에 입학하거나, 좋은 직업을 갖게 되는 성취를 한다면 그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클까. 새삼 우리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남편과의 심한 불화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두 돌부터 한글을 읽었다는 나를 바라보면서 한 줄기 희망처럼 행복했노라고 회고하던 게 생각난다. 물론 막상 자라서는 생각보다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서 엄마를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우리 세대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며 자라 왔다. 내 성취를 최우선으로 놓고 내 행복을 가장 먼저 생각하며 30여년을 살았다. 옛날처럼 다른 형제의 학비를 대기 위해 식모살이를 해야 하거나 부모님이 정한 사람과 결혼을 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세대가 아니다. 그런 우리 세대가, 갑자기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온전히 희생해야 하는 삶은 당연히 낯설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역설적으로 엄마가 되고 나서, 저출산 시대에 '엄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됐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내 행복을 우선시해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더 큰 사랑과 배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