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빅사이즈'는 처음이지?
임신출산을 겪고 77사이즈가 되었습니다.
165.8cm에 69.7kg. 출산 후 14개월이 지난 현재 내 몸상태다. 결혼 전에도 날씬한 미용체중을 유지한 시기는 2차성징 이후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체로 의학적 표준체중 안쪽을 오가던 내가 단 한 번의 임신출산으로 영락없는 '비만'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임신 중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던 입덧 대신 심한 식욕이 찾아왔고(그 원인은 과자를 줘도 꼭 누가 뺏어먹는 양 두세개씩 와구와구 입에 넣고 보는, 신체 발육수준 상위 10% 이내의 우리 아기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만삭 때는 임신 전 대비 25kg나 쪘으며 조리원에서만 12kg가 저절로 빠졌지만 원체 찐 몸무게 폭이 컸기 때문에 여전히 비만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일년여 간은 돌전 아기에게 온종일 매여있느라 운동이나 식이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데다 코로나 시국이라 아이를 맡기고 헬스클럽이나 필라테스 같은 곳도 다닐 수 없었다. 하긴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꾸준한 운동은 힘들었을 듯하다. 돌아서면 이유식 차릴 시간, 잠깐 나갔다 올려치면 낮잠시간, 그게 아니면 무슨무슨 검진이니 접종이니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워낙 삶의 앵겔지수가 높은 나인지라, 식이조절을 했다가는 사이드 이펙트로 분노조절장애를 얻어 애꿎은 아이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아 무서웠다.
원래 애 한둘 쯤 낳으면 '아줌마'가 돼서 살도 좀 붙고 후덕해지는 걸 당연시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애를 셋을 낳아도 처녀 때처럼 날씬하다못해 말라야만 '자기관리'를 잘 하는 걸로 생각하는 시대인 건 나도 알고 있다. 심지어 임산부들도 지나치게 살이 찌면 안 된다며 식이관리를 하는 세상이니까. 당연히 나는 임신 중에 식이관리는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무게는 제한 없이 불어났다. 다행히도 많이들 걱정하는 임신성 당뇨나 임신중독증 등 기타 이벤트는 전무했다. 너무 무탈하고 건강한 임신기간을 보낸 탓인지 식이조절의 필요성을 더 절감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임신한 상태에서도 몸매 걱정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게 더 기이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 어느때보다도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시기인데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뭐,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임신 전처럼 닭가슴살에 고구마로 연명하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건강한 음식을 적당량 먹었어야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임신중의 식욕은 그냥 대충 의지로 참아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과장 좀 보태 길가다가 아무 식당 주방에 처들어가서 있는대로 음식을 마구 쑤셔넣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그래서 가방에 비상용 간식을 넣어 다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게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닌 내 아기가 먹고싶어하는 걸 수도 있으니, 무조건 참기에는 아무것도 모를 아기에게 꽤 미안했다. 그래서 소화에 지장이 없는 한 땡기는 대로 잘 먹었다. 그래서 살도 무럭무럭 쪘고 아기도 무럭무럭 자라서 건강하게 잘 태어났다.
아무튼 나는 그래서 '시대에 맞지 않게' 임신출산으로 몸이 불어난 77사이즈의 엄마가 됐다. 다행히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 그런지 대충 옷으로 가리고 다니면 그냥저냥 덩치 좀 있는 사람으로 보일 뿐 막 그렇게 뚱뚱해 보이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육아만 할 땐 매일같이 홈웨어나 추리닝만 입고 살다 보니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몰랐는데, 복직을 앞두고 오피스룩을 입으려고 하니 아뿔싸, 이전에 입던 옷들이 하나도 맞질 않았다.
결국 새봄을 맞아 옷정리를 하면서 내 옷의 80%는 커다란 짐가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옷들은 언제 세상 빛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만큼이나 막연한 미래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생전 사 본 적 없는 옷들을 구입했다. '빅사이즈 전용' 쇼핑몰에서. 첫 출근 날에 입고 싶었던 스타일의 옷이 있어서 각종 빅사이즈몰을 순회하며 찾아 보았는데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요즘 오버핏이 유행이라 그래도 좀 있을 줄 알았는데, 날씬한 사람의 '오버핏'과 살찐 사람의 빅사이즈는 종류가 다른 것이더라. 겨우겨우 하나를 찾았는데 아쉽게도 품절이었다. 쇼핑몰에 문의했더니 더 이상 제작 계획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입고 싶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옷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육아를 하면서 작은 내 집만이 활동 반경이던 시간을 끝내자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일반적인 여성복 사이즈가 엄청나게 좁은 폭이라는 걸 다시 실감했다. 한국에서의 여성복 사이즈는 44~66정도고, 그나마 내 체감상 정말 '자유롭게' 옷을 고를 수 있는 사이즈는 기껏해야 55 반 까지였다. 흉통이 큰 편인 탓에 결혼전에도 살이 좀 붙으면 66~66반 정도였던 나는 의학적으로 정상 체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세 옷가게에 가면 주인의 눈치를 받을 때가 꽤 있었다. 그나마 환대를 받을 때는 결혼식을 앞두고 살을 미친듯이 빼서 50킬로그램대 초반으로 뺐을 때 뿐이었다. 의학적 저체중에 간당간당해야 비로소 옷 고르기가 자유롭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판은 아니다.
문득 10여년 전 호주에서 생활할 때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당시 나는 햄버거집 알바를 하면서 반값 햄버거를 매일같이 먹어댄 결과 지금과 거의 비슷한 체중 상태로 몸무게가 불어 있었고(물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원래 체중으로 돌아왔다), 어서 빨리 살을 빼야지 하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길거리에서 한 여성이 말을 걸었다. 아마도 뷰티 관련 제품을 파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스스로의 외모가 어떻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어보면서 점수를 매기라고 했던 것 같고 나는 "아, 살이 너무 많이 쪘어요. 얼른 빼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진심으로' 놀라면서 "정말요? 전혀 살 안 쪘는데요. 완벽해요!"라고 답했다. 나는 그게 나에게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립서비스라고 생각했는데, 옷을 사러 옷가게에 가보니 놀랍게도 내 몸은 거기서 그냥 '중간' 사이즈 정도에 불과했다. 옷을 고르는 데 아무 제약이 없었다. 원래 서구인들은 덩치 자체가 크니 어쩔 수 없냐고 하기에는 다인종 국가답게 몹시 마른 아시아인들도 많았다. 실제로 옷 사이즈 자체가 매우 다양했다.
44와 55와 66, 더 실질적으로는 44와 55밖에는 '정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택의 폭에서 배제당하고 마는 것일까.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조차도 막상 비만인에게는 '자기관리를 못한', '나태한' 실패자 취급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외모의 아름다움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몸의 날씬함보다 경제적 부유함, 학식, 커리어의 성공, 화목한 가정,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보내는 행복한 시간 등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건 전혀 잘못된 것도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엄마가 됐다고 애한테만 매달리지 말고 몸매 관리도 하라며 짐짓 애 엄마들을 위하는 듯한 조언들도 사실은 개인의 우선순위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오지랖에 불과하다. 몸매보다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걸 중시하는 게 잘못된 건가? 공부와 커리어 때문에 운동할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당장 몸매보다 더 중요한 인생 목표가 있을 뿐이다.
건강 관리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사람마다 적정 몸무게는 다 다르다. 물론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의 초고도비만이라면 모르겠지만 단지 미용체중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당장 성인병에 걸리기라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다이어트로 건강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도 많다.
말이 길어졌다. 아무튼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몸매 관리는 잠시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을 뿐이다. 모두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 '처녀적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빅사이즈 옷도 좀 다양하게 나왔음 좋겠다. 내 몸이 딱히 부끄럽지 않은 입장에서는 더 다양한 옷을 입고 싶은데, 선택권이 너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