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과연 선택의 문제일까
지구 반대편 실리콘밸리의 고소득자들 사이에서나 유행인 것 같았던 '파이어족(조기은퇴자)' 열풍이 어느새 우리나라 공중파에도 등장할 정도로 '핫'해졌다. 이제는 그냥 재테크에 관심만 가져도 파이어족 아니냐 소리가 나올 정도로 흔한 워딩이 된 것 같다. 내가 파이어족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건 결혼도 하기 전 어느 경제지 기사에서였던 것 같다. 고액 연봉을 받지만 초 절약 생활을 하면서 미친듯이 돈을 모아 40대 이전에 은퇴를 하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무척 부러웠고 나도 경제적 자유만 이룩한다면 쓰고 싶은 글 쓰면서 여행 다니고, 취미로 이것저것 배우다가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소소하게 직업 삼아보기도 하고(하지만 절대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고), 그렇게 여행 다니듯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없었다, 실리콘밸리 종사자들같은 세계적 규모의 직장과 고소득 연봉이.
이제는 포털사이트에서도 한국인 파이어족들의 기사나 인터뷰를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은 대기업이나 금융권 등 고액연봉을 주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장에 종사하면서 재테크(주식, 부동산 등)를 하며 자산을 늘리고 젊은 나이에 퇴사를 한 후 저술활동이나 강연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이들이다. 물론 이러한 글에는 어김없이 부정적인 댓글이 다수 달린다. '저렇게 막 살다가 늙어서 폐지 줍는다', '너네는 대기업 다니니까 가능하지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 '직장 다니는 사람은 바보라는 거냐' 등등.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복직해서 '워킹맘'으로 사실상 육아와 직장일의 투잡을 하고 있는 나로서도 파이어족 열풍에 썩 공감이 되지만은 않는다. 물론 위 댓글과 같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의 파이어족 열풍은, 부와 삶, 노동의 고통을 모두 '개인의 선택'과 '노오력'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먼저 파이어족의 삶은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 자체가 지극히 한정적이다. 아무리 절약을 한다고 해도 10년안팎의 노동으로 평생을 먹고살만한 시드머니를 마련할 수 있는 급여를 주는 직장은 한국에서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경제규모 대비 급여수준이 낮은 탓이고 애초에 실리콘밸리발 소수의 유행을 다수의 평범한 한국 직장인들에게 적용하려는 데서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사실 한국형 파이어족 다수는 진짜 경제적 자유로 삶을 즐기기보단 평범한 직장인에서 저술가, 강연자로 '이직'을 한 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파이어족의 '짠내나는' 절약 과정을 보며 감탄을 하고 본받아야겠다고 하는데, 사실 정말 많은 수의 평범한 중소기업 이하 직장 근로자들은 이미 최소한의 지출만으로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애초에 급여가 작기 때문에 저축은 커녕 당장의 돌발상황을 커버하기에도 벅찬 것이다. 투잡, 쓰리잡을 뛰라는 해결책(?)을 내놓는 이들도 있지만 OECD 최대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투잡을 뛰었다간 '욜로'도 안했는데 진짜 '골로'가는 수가 있다.
파이어족 기사에 흔히 달리는 비판 댓글 중 하나는 '애 있으면 절대 못한다'가 있다. 맞다. 애 있으면 파이어족을 고려하기도 어렵다. 내가 알기로도 해외고 국내고 아이가 있는데 파이어족을 실현한 이들은 딱히 본 바가 없다(어딘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극히 드물단 뜻이겠지). 일단 아이가 있으면 그냥 기본적인 것만 해 주고 키운다고 해도 조기 은퇴는 꿈꾸기 어렵다. 아, 물론 나 역시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애 키우는 데 돈 많이 드는 건 다 부모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이를 막상 키워 보니 그것은 한참 물정을 모르는 생각이었다. 사교육 대신 엄마표로 공부시키고 옷은 물려받고 하는 건 그냥 사변적인 수준이다.
진짜 문제는 아이를 키우는 건 수많은 돌발상황에 대한 노출이란 것이다. 일단 임신-출산-육아 과정에서 정석대로, 별다른 이벤트 없이 무난하게만 크는 아이는 정말 드물다. 선천적으로 이유없는 큰병에 걸려 병원비로 수억이 나갈수도 있고, 우리 아이처럼 나름대로 육아서 보며 열심히 키웠다 해도 느닷없이 발달지연이 일어나 센터를 전전해야 할 수도 있다. 발달센터의 비용은 30~40분에 적게는 5만원에서 많게는 수십 만원까지도 한다. 의료보험 적용 당연히 안된다. 은퇴는 커녕 있던 집도 팔아서 월세 사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고생고생 키워놔도 자라서 입시에 실패해 수험생활이 길어지거나 취업준비가 길어지면 그 준비비용은 오롯이 부모 몫이다. 40대 은퇴는 커녕 70대에도 일을 놓지 않는 노인들이 많은 이유다.
사실 나와 같은 워킹맘들은 조기 은퇴보다는 오히려 '강제 은퇴'를 당할까봐 걱정을 하는 게 더 현실적인 고민일 것이다.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엄마의 부재가 티 나는 아이들, 무슨 일만 나면 아빠 대신 엄마만 찾는 기관들, 일하는 엄마에 대한 따가운 시선, 남직원 위주로 돌아가는 사내 정치 등... 까딱 정신을 놓으면 순식간에 경력이 강제 단절당하고 원하든 원치않든 전업주부가 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나 역시 아이의 발달이 늦다는 걸 알고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센터 비용을 알아보고 일단 계속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남편의 휴직이 가능하지 않았더라면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누가 애 낳으랬어?" 그렇긴 하다. 근데 모두들 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공동체는 누가 유지하나? 물론 사람은 각자의 행복을 위해 사는거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살라는 건 너무 해묵은 주장이긴 하다. 나도 솔직히 우리 사회 공동체보다 내 행복이 더 소중하다. 근데, 어쨌거나 공동체 존속에 도움이 되는 행동보다 개인의 행복을 우위에 두는 행동을 '우월한' 것처럼 올려치는 풍조는 썩 건전한 건 아닌 게 사실이다. 파이어족을 지향하는 이들에 대한 비하나 비난으로 읽힐까봐 조심스러운데 그런 건 아니다. 모든 삶엔 우열도 없고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이상 잘잘못은 없다.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을 낳고 늙어서까지 직장을 다니는 걸 '미련한' 행동으로 취급하는 암묵적 사회 분위기는 뭔가 잘못돼도 너무 잘못됐다.
나 역시 직장이 지긋지긋하지만 파이어족을 '감히 꿈 꾸면 안 되는' 상황인 워킹맘이다. 남편은 안정적이지만 고소득과는 거리가 먼 공무원이고, 나 역시 대기업이 아닌 겨우 중견 정도의 규모 직장에 다니고 있다. 게다가 양가 모두 형편이 어려워 지원은 커녕 노후 의료비를 우리가 도와 드려야 할 듯하다. 다달이 생활비는 전적으로 못 도와드려도 크게 아프면 외면할 순 없지 않은가. 아이는 날로 자라면서 더 많은 투자 비용을 요구하게 될 거고 주택 대출 갚을 일도 까마득하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멱살을 쥐고 흔들어도 끈질기게 버텨야 하는 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회사 눈치나 보면서 낮엔 회사로 출근, 저녁과 주말엔 육아하러 집으로 출근하는 삶은 그저 가치없고 소모적일 뿐인가? 사실 잘 생각해보면 소수의 부유한 파이어족보다는 우리 가정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다수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파이어족 열풍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일으키고 평범한 삶을 무가치한 시간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 같다.
사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뜬구름같은 파이어족 무용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다 자신의 자리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 조성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치열하고 성실한 하루하루에도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3~4인 가정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집 한칸 마련이 어렵고, 맞벌이가 아니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며, 살면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돌발상황에 철저히 '각개전투'로 맞서야 하는 터라 너무 쉽게 극빈층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현실이다.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미련하고 구시대적이라 내몰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도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