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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실 줄 몰라요

#15. 진짜 이대 다니는 여자를 만나다

by 생쥐양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남동생은 평일과 주말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주일에 1번, 두 시간 수업에 동생이 받는 과외비는 꽤 쏠쏠하다. 비싼 대학 등록금을 과외비로 메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그가 '월급'을 받는다고 표현하고 싶다.


동생은 나름 지방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했던 수재였어도 대학교에서 그의 위치는 평균이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몰려든 머리 좋고 집안 좋은 애들 사이에서 장학금을 획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경쟁'에서 피를 튀기기보다 '평화로운 백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즉, 거친 세상에서 자유를 향해 몸을 쓰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잘생긴 명문대생이 살아 남기 위해 수없이 두드린 높은 담벼락의 초인종은 그렇게 동생의 밥벌이가 되었다. 가끔은 고시생 누나에게 용돈도 건네주었으니 우리 집의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누나, 알지? 누나 사주에 재물이 넘친다는 거. 나중에 성공해서 나 모른 체하면 안 된다. 동생 좀 잘 봐주라. 사랑하는 누님"

신실한 기독교 신자가 사주 이야기를 건네는 그 유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 아이의 깊은 속내를 알기에 답장도 보내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백수의 삶을 살고 있는 동생에게 1년간 만남을 이어온 여자 친구가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집에 내려오면서 대학 생활 이야기는 주저리주저리 말도 많던 아이가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보다 엄마를 더 챙기는 것 같다.

"엄마, 내일 조조로 영화표 끊어놨으니까 내일은 식당 문 천천히 열어요"

"내일까지 있어도 돼? 과외는?"

"보강 잡아놔서 괜찮아요. 엄마, 이 영화배우 좋아하잖아."


나는 모자(母子)의 간지러운 분위기에 민망함을 달래러 슬쩍 밥숟가락을 얻어보았다.

"너, 그러다 여자 친구가 마마보이라고 놀리는 거 아니야? 누나랑도 같이 간다고 해. 그래야 안 삐치지"

"누나랑 둘이 영화 보러 간다고 하면 삐치겠지. 엄만데 뭘. 부러우면 같이 보러 갈래?"

"아니야, 엄마랑 둘이 데이트 잘하고 와"


동생의 성숙한 행동과 배려에 양심 고백하지 못했지만, 사실 얼마 전에 나의 커피소년과 함께 그 영화를 보러 갔었다.

'엄마는 바쁘니까', '남자 친구와 오랜만에 데이트하니까', '영화가 보고 싶어서' 등 수많은 변명거리를 찾아내며 나의 행동이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에 빠지면 그 남자만 보이는 나와 달리, 사랑에 빠져도 이성적인 동생이 부럽다는 것을 말이다.


째깍째깍,

동생이 집에 머무른지도 벌써 삼일째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버스표를 끊어서 서울에 올라가야 할 녀석이 짐도 챙기지 않고 꾸물대고 있다. 동생 얼굴 보려고 서둘러 도서관에서 빠져나온 나는 걱정되어 물었다.

"너... 안 올라가?"

"응, 며칠만 더 있으려고"

"며칠?"

"혹시 너, 과외 잘린 거 아니야? 아님 여자 친구랑 싸웠어?" 농담처럼 건넨 우스갯소리에 진담인 듯 받아들이는 동생의 표정에 다시 물었다.

"뭔... 데..?"

"누나, 내 여자 친구 이대 다닌다. 진짜 이대. 진짜 이대 다니는 여자."

"......"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영화 속 대사에서만 들어봤던 '이대 다니는 여자'가 동생의 여자 친구 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의사이시고... 여자 친구 여동생 과외하다가 그 집 부모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본인 딸 만나보라고 소개해주시더라고."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부모님이 직접 나서서 너희 둘 이어주신거잖아."

"그렇지, 불평할게 하나도 없지..." 말끝을 흐리며 정리되지 않는 마음의 조각들을 끼우느라 애쓰는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혼한 가정,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 이 두 가지만 어깨에 짊어지기에도 삶이 자유롭지 못한데 사랑이라는 발목이 하나 더 늘었으니 나도 동생도 억울할 때가 있었다.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의 무게를 덜어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그렇다. 그건 '사랑'이란 게 단순히 막대사탕처럼 달콤한 맛만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걸, 먹다가 뱉어낼 때도 떨어뜨릴 때도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동생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위로의 말들을 떠올렸지만 그건 그저 '대사'에 불과했기에 슬픈 연극을 관두기로 했다.


우리 남매의 적막을 깨우는 건 다름 아닌 뻐꾸기시계였다. 일요일 저녁 7시, 엄마가 저녁 장사를 일찍 마치고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다. '엄마'라는 존재가 사랑의 감정도 잠재우리만큼 강력한 걸까? 우리는 서둘러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아들 녀석 서울에 보내기 전 든든히 먹고 힘내라고 어제저녁부터 재워두신 불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동생도 말없이 밥을 푸며 식탁 위에 수저 세 개를 나란히 놓는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수저 세 개가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인다.


'딩동'

"성주야, 엄마 오셨나 보다. 나가봐"

"....."

"뭐 해? 문 안 열고?"

인터폰 앞에서 얼음처럼 서 있는 동생 앞에 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누.. 구.. 세요?" 나의 어리숙한 질문에

"안녕하세요, 저 성주 오빠 여자 친군데요. 혹시 성주 오빠 있을까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그녀는 한눈에 봐도 이대 다니는 그 여자였다.

"누나, 내가 나갈게."


나는 궁금했다. 좋은 집안에 좋은 대학을 다니는 여자는 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말이다. 인터폰 너머로 살짝 보이는 그녀는 참 세련되고 귀티 나 보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 세 시간을 넘게 남자 친구의 집으로 달려오는 여자의 심정은 무엇일까 추측해 보려 했지만 그것보단 이들의 결말이 더 궁금해졌다.

내 방 창문을 조심스레 열자, 두 연인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들어왔다. 보고 싶은 마음과 원망이 섞여 잇는 여자와 당혹스러움과 차분함이 묻어나는 남자는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의 클라이맥스는 그녀의 첫마디로 시작되었다.

"일주년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미안하다, 생각 좀 정리한다는 게 그리됐어"

"생각? 무슨 생각? 설마... 헤어지자는 거야?"

"아니, 그런 생각이 아니라..."

"오빠, 내 친구들 죄다 의사 남자 친구 사귀며 시계며 구두 받았다고 자랑질할 때도 코웃음 쳤어. 우리 아빠가 오빠 졸업하면 데릴사위로 들어오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나한텐"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오빠가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 일주년을 망쳤으니 나 선물 하나 해줘. 명품백. 그럼 나도 더 이상 울 아빠가 했던 애기 꺼내지 않을게. 오빠 마음 바뀔 때까지 말이야."


그녀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이제 동생의 마지막 대답만이 남아있다.

"지혜야.... 나 있지. 식당에서 고생하시는 우리 엄마한테도 명품백 하나 못 사드렸어."


한참을 멍하니 숨도 쉬지 못한 채 서 있던 그녀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남자 친구의 마지막 배려에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는 혼자 또각또각 골목을 걸어 나갔다. 나의 귓가에 그녀의 구두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는 건 동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엄마의 퇴근시간이 늦다.

엄마는 지금쯤 어느 골목 어귀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자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얼굴이 얼룩져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슬픔이 지나가면 사랑이 찾아온다.

그러니 엄마의 마음도 따뜻한 밥 한 숟가락 먹으며 지나가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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