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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Sep 07. 2022

용기


잔다르크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녀가 여성이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영웅이어서도 아닙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읽게 되었던 동화책 속에서 만난 그녀의 용기는

방에 틀어박혀 친구 없이 지낸 어린 소년에게 등불같이 뜨거운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성장하면서 그녀는 동화가 아닌 역사의 등장인물임을 알게 되었고 

좀 더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잔다르크를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프랑스인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작은 오류를 제외한다면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과 잔다르크의 극적인 삶의 이야기는 

영화적 재미를 넘어 진한 감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밀라 요보비치의 열연도 좋았지만 한 여성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프랑스를 구해내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동화 같을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잔다르크'


이처럼 용기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 생각했습니다.

참 오랫동안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나에게 용기는 거리가 먼 영웅의 이야기였고

히어로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나 주어진 특별한 능력처럼 여겨졌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하고 싶은 것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흥분된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느덧, 아무도 내 모습을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는 여리고 작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던하게 일상을 살아내는 요즘 제법 작은 일도 힘겹게 느껴집니다.

아침이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어렵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 군침을 흘리기보다 탈이 날까 두렵고

장을 볼 때마다 얼마를 계산해야 할지가 두렵습니다.


나약함이 일상이 되어 갈 무렵,

불안과 우울을 토로하는 남편에게 등을 쓰다듬으며 응원의 말을 건네는 

아내의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요."


용기


그걸 찾아내어 보이라는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나에겐 없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내 속 어딘가에는 용기가 숨겨져 있나 봅니다.

아내의 충고대로 내 속에 숨겨진 용기를 찾아 나서 봅니다.


요즘 인기 있는 전쟁 영웅의 영화를 찾아보고 히어로 영화도 다시 봅니다.

책도 읽고 유튜브를 보면서 세상을 바꿨던 인물들의 삶을 추적해 갑니다.

감동적이고 멋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탐구할수록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감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뜯어봐도 내 안에는 그렇게 대단한 용기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나에겐 용기가 없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다가올 때였습니다.


집에 말 벌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막내딸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다 큰 아들들은 도망 다니느라 바쁩니다.

벌레라면 질색하는 아빠지만 군대에서 벌집 청소하던 기억이 있어

모기약을 뿌리고 모기채로 눌러 잡은 뒤 휴지로 감싸 재빨리 처리했습니다.

평온해진 거실의 현장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연신 아빠의 용기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곤 벌이 나오면 아빠가 처리하라며 친절하게 임무를 추가해 주었습니다.


세상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말벌 집은 여전히 어딘가에 있을 테고 또 다른 말벌들이 평범한 도시인의 삶을 위협하겠지요.

전쟁의 위기를 막아내지도 오르는 환율과 경제 위기를 막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빠의 용기를 칭찬했습니다.

물론 다음에도 말벌이 공격해오면 아빠가 해결해 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는 칭찬입니다.


여전히 무기력한 중년이지만 한 순간 용기 있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용기란 내 안에 숨어 있다가 언제든 나타나는 또 다른 나 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내 모습 자체가 용기일 수도 있겠네요.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용기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이불 밖은 위험하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위험을 향해 당당히 일어섰습니다.

나와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때론 나의 시간을 들여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를 개면서 가족의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감정을 토해낸 문장들은 용기 내지 않으면 발행되지도 않겠지요.

이 모든 것이 용기를 통해 움직이는 것들이라 생각하면

나는 어쩌면 생각보다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당신도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요?

내 용기를 취소할 수는 없으니 당신도 용기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당신은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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