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선선하면 앞집의 모녀가 마당에 나와 계십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딸의 대화는 제법 선명하게 들립니다.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 때문에 두 모녀의 대화는 소리치듯 이어졌고
창문을 열어 두면 모든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와 꽂힙니다.
대화의 80%는 모녀간의 다툼입니다.
밥을 달라는 할머니와 방금 드시지 않았느냐는 딸의 다툼은
너만 맛있는 거 먹고 왔냐는 할머니의 의심에
그러지 않았다는 해명으로 이어집니다.
남의 집 고추를 따야 한다는 할머니를 만류하는 딸의 목소리에는
간병인의 고단한 일상이 묻어 있습니다.
듣는 사람도 조금 피곤하게 느껴질 무렵
딸은 대화의 내용을 빠르게 바꾸어 냅니다.
“엄마, 나 학교 다닐 때 엄마가 사준 가방 기억나? 예쁜 꽃 모양 그려져 있던 거.”
“그럼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몇 달을 모아서 산 거야.”
조금 전 일도 기억 못 하시는 할머니께서
수십 년 전 일을 기억하십니다.
그 이야기로 딸과 달콤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할머니는 딸의 새 학기를 위해
두고두고 모아 온 돈으로 제법 멋진 가방을 사주셨던 것 같습니다.
딸은 그 가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가방을 선물하기 위한 본인의 노력을 열심히 설명하셨습니다.
딸의 리엑션으로 유추해 보자면 딸은 이 이야기를 수 십 번 넘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당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참 반가운 웃음입니다.
조금 지나면 두 분은 또다시 전쟁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날의 기억으로 마당 가득 훈훈한 향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는 병을 겪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있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는 것 같습니다.
사랑할수록 아름다운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할수록 아픔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할수록 슬픔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