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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류완
Oct 14. 2022
운수 좋은 날
아침부터 복통이 심해 출근을 조금 미루었습니다.
아침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아 좋았습니다.
늦은 김에 면허증 갱신용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을 찾았습니다.
사진관 사장님께서 육아 때문에 쉬신다는 친절한 안내 문구를 보고
아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기를 바라며 다른 사진관을 찾았습니다.
검색 끝에 골목 구석에 숨어있는 사진관을 찾았습니다.
6명이 대기 중인데 사장님 혼자서 사진 찍고 보정하고 인화하고 예쁘게 봉투에 담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 찍는 화사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덕분에 지친
내 표정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면허 갱신용이지 입사지원서도 아니고 소개받기 위한 사진이 아니니까요.
뒤늦게 출근하는데 지하철 한 대가 그냥 지나칩니다.
회송 열차랍니다.
3호선을 오래 탔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오, 행운입니다. 덕분에 다음에 타게 된 열차에는 승객들이 많았습니다.
외롭지 않은 출근길입니다.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나름 이름 있는 돈가스 집입니다.
기다리는 손님들도 많았습니다.
잠시 후 우리 팀도 자리를 잡고 맛있는 돈가스를 받았습니다.
모두 맛있다는데 나만 이상하게 고기가 씹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먹은 돈가스에만 돼지 힘줄 같은 게 있었나 봅니다.
삼키지 못해 남긴 양이 제법 됩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마침 탈이 났었는데 오후의 뱃속은 평온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지방으로 우편물을 발송하는 날입니다.
7년 넘게 잘 보냈는데 오늘은 우체국 직원이 포장 상태 불량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우편 취급소를 찾아보았습니다. 지하철로 세 정거장 거리에 있었습니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 우편물이지만 마음이 급하니 무겁지 않습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우편 취급소는 사람이 많지 않아 쾌적했고
직원분은 친절하게 우편물을 챙겨 주시면서 우편 스티커도 함께 붙여 주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친절한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둘째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축구하다 벌에 쏘여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한 해 평균 만 5천 명 정도가 벌에 쏘여 병원을 찾는다고 하는데 우리 아들이 그중 한 명입니다.
자주 다니던 가정 병원에 연락을 한 뒤 담임 선생님께 외출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들의 상태가 걱정되어 통화를 부탁드렸습니다.
다행입니다.
아들은 오후 수업을 안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덕분에 저까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지하철을 오래 타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옵니다.
오늘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합니다.
다행히 자리가 생겨서 앉을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졸다 일어났는데 한 정거장 조금 넘게 온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통이 통제되어 있었나 봅니다.
덕분에 꿀잠 자고 일어났습니다.
분명 꿀잠을 자고 집에 도착했는데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옷 갈아입을 힘도 없이 뻗어 있는데, 오늘 저녁은 아빠표 카레라이스가 먹고 싶다고 합니다.
오후 수업을 쉬었던 둘째가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말수가 부쩍 줄어 걱정이던 녀석이 특별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아빠표 카레라이스는 양파를 듬뿍, 45분 동안 볶아내는 특별식입니다.
하얗게 불태운 하루, 오늘은 혹시 수면제를 먹지 않고 잠들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었습니다.
아뿔싸! 버스에서 꿀잠 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머릿속에 창밖으로 보이던 한강 물이 멈추지 않고 흐릅니다.
조용히 다시 일어나 약을 먹고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일주일 전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복기하며 그날의 일을 정리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즐겁습니다.
흥미진진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던 특별한 날로 기억됩니다.
인생이 참 재밌습니다.
비극도 시간을 묻히면 조금씩 희극으로 변하나 봅니다.
살다 보면 모든 시간이 보석처럼 찬란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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