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속으로 걷기

by 류완


자극은 감정을 일으킵니다.


복잡하게 작동하는 감정의 네트워크는 인간관계뿐 아니라 보고, 듣고, 말하고,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고, 멋진 풍경을 보고, 수다를 떨거나, 편안한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감정을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감정을 유발하는 요인 중 하나는 ‘공간(space)’입니다. 공간은 감정을 움직이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신경과학자이자 도시환경연구가 콜린 엘러드는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텅 빈 건물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 활발한 거리에서 느끼는 감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도시 환경에서 불안이 증가한다면 자연 공간에 접근 가능한 환경이 불안을 감소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경험과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붐비는 번화가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용하고 느린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면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층 건물 앞에서 우리는 아무런 감정과 주장 없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을 떠올릴 수도 있고, 힘들고 지친 동료 직원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공간에서 느끼는 감정은 축적된 경험과 인간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의 편안한 공간이 존재합니다. 저마다의 축적된 기억 속에서 편안한 공간을 찾아냅니다.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라던가, 놀이터 한 편의 그네일 수도 있고,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차 한잔을 마셨던 거실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편안했던 공간은 할아버지 집 마당의 커다란 감나무 그늘이었습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한 편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때론 기억은 왜곡을 허용합니다. 대충 커다란 나무 밑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때 거기라는 착각을 일으키곤 합니다.


방송과 매체는 다양한 개인의 추억을 일반화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카페, 이런 식당, 이런 공원, 이런 숙소들이 어떠냐며 추천합니다. 추억의 맛, 추억의 공간이라고 하지만 나의 기억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만족했던 곳이기에 신뢰를 얻고 찾아갑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느꼈을 편안함을 나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금전적 지급의 형태로 얻습니다. 감정과 공간이 소비와 만나게 되는 시점이 되면 우리는 진정한 도시인의 자격을 갖춰갑니다.


커피 한 잔 값이 한 끼 식사를 넘어서고 있지만, 가격의 역전 현상에 딱히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커피 한 잔과 편안한 공간, 그리고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구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DSC_8792-1212.jpg 즐겨 찾는 카페의 자리, 꼭 이 자리가 편안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공간을 대하는 감정도 변할 수 있습니다. 시끄러운 번화가에서 흥분 상태에 빠지더라도 다시 혼자의 시간이 되었을 때 밀려오는 외로움은 이전보다 더 커질 수 있습니다. 한때는 번화한 거리를 즐겼다면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자연의 고요함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표현됩니다. 지금은 편안한 장소가 떠올리기도 싫은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공간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건과 흔적은 공간을 대하는 감정을 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공간을 정적으로 이해합니다. 공간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움직여 공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간의 언어적 의미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물체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사방이 막힌 제한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일으키는 모든 행위가 공간 안에서 일어납니다.


철학적 개념으로서 공간은 시간과 함께 세계를 이루는 기본 형식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서로 간섭하고 함께 변화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합쳐 시공간(spacetime)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하루를 이야기할 때, 하루 동안 내가 존재했던 공간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공간은 천천히 변해갑니다. 공간이 달라지면 시간의 흐름도 달라집니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운동에 영향을 받습니다. 나의 움직임은 시간과 공간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동의 변화에 따라 느껴지는 하루의 길이가 달라지고 공간에 대한 감정도 달라집니다.






걸음은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기에 좋은 운동입니다. 햇살이 따듯한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그늘이 서늘한 건물 사이를 걸을 수 있습니다. 걸음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달라지지만 느린 이동 속도는 풍경을 이해하고 담아내기에 좋습니다. 걸음은 다양한 공간이 주는 감정을 한 번에 품어낼 수 있습니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다양한 생각을 담을 수 있습니다. 걸음은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운동입니다.


편안한 공간에서 느끼는 감동과는 다릅니다. 걷기는 더 큰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10분이면 1km 이내의 공간을 걷습니다. 넓고 긴 거리일수록 다양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보름간의 도보 여행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이렇게 뿌듯하게 존재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걸음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현대 과학으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피츠버그 대학의 커크 에릭슨 박사는 걷기 운동이 뇌의 건강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텍사스 대학의 연구팀은 걸음이 우울증을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달리기만큼 강력한 유산소 운동은 아닐지라도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는 이보다 좋은 운동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 에너지까지 모두 효과적으로 반응합니다. 몸과 마음에 긍정적 효과를 이끄는 운동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변화는 불안한 감정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변화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몸을 단련하듯 감정을 위한 운동도 필요합니다. 걸음은 두 다리와 심장의 근육을 단련하기도 하지만 감정을 위한 운동입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걸으면 걸을수록 새로운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큰 공간으로 나를 적응시키는 건강한 훈련이자 즐거운 상상의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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