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제일 오래 된 기억이 언제에요?"
아들은 아빠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던져 놓고 자기는 5살 때
아빠한테 오해 받아 혼났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묘한 압박감을 주었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나에겐 평범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한 경험으로 남기도 하니까요.
아들의 질문에 성실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억
5살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유치원을 다닐 때였으니 아마도 6살, 혹은 7살이었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는 매우 불쾌한 기억입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처음으로 돈을 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길 건너 교회를 가는 길 중간에 자주 가는 서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형이 좋아하는 소년 잡지를 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천원짜리 지폐를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첫 심부름에 신난 아들은 겁도 없이 돈을 접었다 펴면서 익숙한 길을 걸었습니다.
서점이 눈에 보일 때 즘에 아저씨 한 분이 저를 잡았습니다.
"어디가니?"
"서점에요."
순진한 어린이는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에 돈을 들고 다니면 안된단다. 아저씨가 사다 줄께 돈을 주렴."
진심으로 그 말을 믿었습니다. 착한 아저씨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서점을 지나쳐 골목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30분은 넘게 서서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30분, 그 아저씨를 믿었던 마음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돌아봅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설명드렸고,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손을 잡고 서점으로 가서 잡지를 사다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한 기억입니다.
유치원에 예쁜 여자 아이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딱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예쁜 아이였습니다.
여자 아이는 첫 날 부터 내 옆에 붙어 앉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자리를 정해주신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여자 아이는 항상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한 학년 가까이 그렇게 붙어 다녔습니다.
어느 날, 여자 아이는 집으로 가는 길에 뜻밖의 질문을 건냈습니다.
"나 내일 너네 집에 놀러 가도 돼?"
"응? 으응. 그래."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집까지 놀러 오리란 생각은 못했습니다.
유치원 밖에서는 집 앞 공터에서 남자아이들과 뛰어 노는 것 밖에 몰랐으니까요.
다음 날 정말로 여자 아이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왔습니다.
뜻밖의 손님에 엄마는 사뭇 놀란 눈치였습니다.
간식을 챙겨 주시고는 재밌게 놀다가라고 하시며 일하러 나가셨습니다.
책도 꺼내 보고, 앨범도 꺼내 보고, 장남감도 꺼내 가지고 놀았습니다.
살짝 불편하면서도 행복한 시간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나 이제 갈께."
"응, 그래, 잘가."
일어서려던 여자 아이는 갑자기 돌아 앉았습니다.
"너 잠깐만 눈 감아봐."
"왜?"
"그냥 감아봐."
"그래"
순진한 남자 아이는 아무 생각없이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순간 무언가 촉촉한 기분이 오른쪽 뺨을 스쳤습니다.
아, 물론 뺨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수위 조절을 위해 뺨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곳일 수도 있습니다.
놀란 아이는 눈을 번쩍 뜨고 여자 아이의 눈을 바라 보았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는 눈동자에는 내 놀란 표정이 다 보일 정도였습니다.
몇 달 뒤 여자 아이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동네를 떠났습니다.
유치원 행사 때 사진에는 그 아이의 얼굴이 남아 있지만 이름이 기억나질 않습니다.
다른 흔적은 거의 지워졌지만, 그 날의 기억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겪은 두 개의 사건은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을 가슴 깊이 남겨 주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풋풋하고 귀엽지만, 내게 이성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이 가장 오래 된 기억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의 순서를 따지자면 둘 중 하나는 더 오랜 기억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내 삶의 기억에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내 안에서 상처받았던 기억과 사랑받았던 기억을
하나씩 사이좋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작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사람에 대한 불신과 조심성을 키워냈다면
다른 하나의 기억은 좋아하는 감정을 키워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개의 사건, 두 개의 기억,
내 마음의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해 살아가는 균형을 잡아주는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기억도 아픈 기억도 내 삶의 한 조각입니다.
트라우마로 남기도 하고, 삶의 힘이 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노트에 책깔피를 끼워놓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든 열어 볼 수 있는 페이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입니다.
아픔은 아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내 모습의 한 조각이 되었습니다.
지워지지 않으니 안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어린 시절, 소중한 기억이니까요.
지금의 나는 노년에 어떤 기억으로 자리잡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고서도 잘 살고 있는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나에게 일어난 몇몇 이야기들은 추억의 책깔피가 되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날을 뒤적이며 밤을 샐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성실히 살고자 하는 의욕까지는 생기지 않습니다만
좀 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들에게는 미안했다고 말 해 주어야겠습니다.
그 기억도 언젠가는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