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술잔을 타고 흐르는 대화는 노선을 잃기 마련이다.
삶이라는 소재가 고갈되고 나면 판타지가 현실이 된다.
꼭 그런 친구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술맛 떨어지게 하는 친구.
그 친구는 오늘도 재미없는 소재로 대화의 흐름을 방해한다.
"야, 너는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
헛웃음이 이어지자 기다릴 새도 없이 친구는 자신의 소망을 늘어놓는다.
"나는 지난주 이 시간으로 돌아갈 거야."
"왜? 뭐 하려고?"
특별한 대답을 원했을까?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흐름이다.
"뭐 하긴. 지난주 로또나 맞춰서 집이나 장만해야지. 당첨 금이 30억이 넘는다더라."
길게 늘어지는 한숨에 술맛이 떨어졌다.
허황된 친구의 소망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완강한 거부, 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을 뼛속까지 느끼게 해 주고 싶었나 보다.
쏘아붙이는 대답과 함께 의자에 기댄 상반신을 곧추세웠다.
"그래? 그럼 너 지난주 로또 번호는 알고 있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가게 되면 열심히 외워야지."
"야 인마! 갑자기 타임머신을 탈 기회가 왔어. 그런데 로또 번호 찾다가 놓치면 어떡할래?"
"그거야 뭐, 일단 알고 있다는 전제로?"
"지금도 모르고 있는데 그때라고 기억나겠냐?"
"그렇군. 일단 매주 당첨 번호를 외우고 있을까?"
"푸하하하. 너 바보냐? 타임머신 기다리며 지난 당첨 번호를 외워? 크크크."
친구가 바보라서 다행이다.
이 정도 이야기 했으면 '너도 생각은 해봤구나'라고 반문은 해보았을 터다.
시답잖은 농담을 끝내려는 찰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친구는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와나 넌 타임머신 탈 수 있으면 언제로 돌아갈래?"
"나?"
웃기는 질문이 내 앞에 놓이자 잃었던 술맛이 돌아왔다.
그래도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말은 도저히 못 하겠다.
두 손가락으로 술잔을 살포시 집어 들어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 짧은 순간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난........... 음, 나는 반 고흐를 만나보고 싶어."
"크큭, 와하하하."
이 자식, 내 비웃음에 대한 앙갚음이 분명하다.
"하이고~ 그래 미스터 빈은 만나서 뭐 하게?"
그래 넌 고흐가 누군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술기운에 맡겨 내 생각을 늘어놓았다.
"그 사람의 그림이 딱히 좋아서는 아닌데 말이야."
이 정도 했으면 고흐가 화가란 사실은 친구도 알았겠지 싶었다.
"그 사람 그림도 그려?"
아직도 코미디언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상관없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듯싶다.
"Anyway, 어쨌든, 고흐의 죽기 전 날로 가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 사람 죽었구나. 어쩐지 안보인지 오래된 것 같더라. 그래 우리 와니는 뭐가 그리 궁금하실까?"
두 사람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인물은 다르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진다. 이것 또한 남다른 재미다.
한 잔 술이 건네주는 즐거움인지도 모르겠다.
상관없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고흐를 향한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생각이었는지, 귀를 자르고 얼마나 아팠는지,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가장 행복한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지."
"거참 궁금한 것도 많네. 그냥 술 한잔 하자는 거 아냐?"
"크크, 그래, 맞아. 여유롭게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
"야, 그래도 싸인 한 장 정도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 그럼 뭐 그림 한 장만 선물로 달라 그러지 뭐."
"그게 다야? 너는 하고 싶은 말 없어?"
곰곰이 생각이 이어졌다. 한 잔 술을 넘기자 번득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만 알 수 있도록 귀에 대고 속삭여 줄 거야. 당신의 이름과 당신이 그린 그림은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을 거라고."
"니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구나 그나저나 그림은 가져다가 어디에 쓰려고 그래?
고작 그런 이유로 타임머신 타는 기회를 낭비하고 그러냐?"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딱히 반박할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로또 30번은 당첨돼야 살 수 있는 그림이라도 나는 팔지 않을 테니까.
이어지는 솔직한 대답이 이 술자리의 주제가 아니었을까?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낭비하고 있으니까."
아주 오래간만에 단편 소설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소설은 제 삶의 일부분을 걸치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습니다.
친구와 나눈 대화의 아주 작은 부분을 소설로 간추려 봤습니다.
당연히 저는 주당도 아니며 친구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다만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고흐를 만나고 싶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대화만 가능하다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에게 100년 뒤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전 세계 사람들이 노래로 부르고
당신이 아는 가장 돈이 많은 부자도 당신의 그림을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위대한 모든 예술적 영감은 작가의 고뇌와 아픔,
갈등과 연민, 희망과 사랑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고흐의 작품에 담긴 예술 혼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겠지요?
고흐의 파란만장한 삶은 모니터 너머에 남겨 두고 이 말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남긴 이야기가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 사실 전 타임머신을 타고 온 미래 인간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