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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Aug 08. 2020

나의 아내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이후, 두 번의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가족은 한 명씩 늘어갔습니다. 따로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첫 아이를 맞이한 부부는 전쟁 같은 육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고통의 기억은 잔잔한 추억으로 남았고 자녀는 축복이라는 불안한 믿음을 채웠습니다. 그렇게 4년을 주기로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길고 긴 육아의 시간은 안타깝게도 부부의 선택이었습니다.


셋째를 낳은 후 가까운 사람들은 짓궂은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월드컵 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몇 번은 대답해주었습니다. 월드컵 때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 이듬해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나중에는 대답도 귀찮아서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했습니다.


아내는 육아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육군 병장 출신의 남편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게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었습니다. 12년 넘게 어린이집을 다녔고, 유모차 드라이빙을 했으며, 꼬박꼬박 아이들의 낮잠을 재웠습니다. 4년 넘게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분유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강철 같은 엄마입니다. 시간이 지나 모유 수유에 대한 아내의 철학을 물었습니다. 아내의 대답은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아이들이 분유를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참 불효 막심한 녀석들입니다.


아무리 육아에 참여해 보아도 남편은 항상 미숙합니다. 이등병도 계급장 하나 늘면 따로 시키지 않아도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알아서 하는데 강산이 변하는 동안 시키는 일만 반복하기도 벅찼습니다. 아이의 미세한 변화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즉각 반응하는 아내와는 달리 남편은 목욕 한 번 시키는데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신경은 곤두섰으며, 누가 씻은 건지 모를 정도로 흠뻑 젖었습니다.


셋째를 끝으로 우리 가족의 구성은 마무리되었습니다. 2014년 월드컵에는 새로운 가족 대신 아내의 갑상선에 생긴 작은 혹을 만났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권유로 바로 떼어내야 했습니다. 아이를 매우 좋아했던 아내는 그 이후로 단호하게 ‘그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셋이면 충분하다고 말해 주었지만, 아내는 혹시 자기에게 생긴 질병이 아이들에게 이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2017년, 아이들이 모두 담긴 마지막 사진, 아이들은 이제 아빠의 카메라를 거부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순둥이 같던 아이들도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니 누군가 스위치를 눌러 놓은 것처럼 거절과 반항을 반복했습니다. 얄밉기 그지없습니다. 가족이 원수가 되는 순간이 이토록 짧을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러한 시기를 보냈을 텐데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내 욕심대로 자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딱 그맘때였습니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뒤척이다가 두 시간이 되더니 세 시간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몇 시간인지 세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잠이 안 와서 소리를 지르고 커튼을 걷었는데 강렬한 햇살이 속눈썹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아침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잠드는 일은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생각은 실타래처럼 꼬여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 잔 마시기도 하고 수면제를 처방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침이 힘들어질 뿐 잠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의 총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습니다. 일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고 우울감이 늘어나면서 부정적인 언어가 늘었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날이 늘었고 친구들의 연락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은 돌고 돌아 나는 결혼을 하면 안 되는,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불혹의 나이, 세상에 미혹되지 않을 시기에 조금씩 세상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세 아이의 아빠, 가장, 40대 남성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부끄러운 경험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가족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는 이름 모를 가장의 고백이 정답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 답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습니다. 당연히 나의 아픔은 부끄럽게 느껴졌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비밀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내가 소화가 안 된다며 함께 산책을 나가자고 요청했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기에 답답한 가슴도 풀어낼 겸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 공원을 향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별다른 대화는 없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집중력을 흩트리며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아내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았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얼마 만에 잡은 손인지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아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결혼을 잘한 것 같아.”


처음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딱딱히 굳어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삼키며 한참 동안 뜸을 들인 남편은 짧은 답변을 건넸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부부는 딱히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해가 지났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종종 떠오르는 불안감은 턱 밑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밀어 올립니다. 달라진 현실은 없습니다. 여전히 무능한 남편이자 부끄러운 가장이며 무엇보다 나약한 심장은 변하지 않은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남편은 거의 매일 같이 아내와 걸음을 맞춥니다. 가능하면 걷기로 했던 계획이 지금은 부부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걷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대화는 더욱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부부의 수다는 거리를 가득 채웠고 때론 마치지 않은 이야기 때문에 한 바퀴를 더 돌기도 했습니다. 길고 긴 육아의 시간 동안 감춰졌던 아내의 생각이 몇 번의 걸음만으로 마음에 닿았습니다. 아내는 그 긴 시간 동안 항상 나를 지켜보며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와의 걸음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지금의 모습에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합니다.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지만 다시 또 걸을 때마다 다짐은 확신으로 다져집니다. 아내는 언제나 나보다 강했습니다. 한순간도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아내가 나의 이야기에 즐거워하고 발을 맞춰 걷습니다. 이보다 강력한 아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내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말고 나의 이야기를 써보라는 권유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풀다 보면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겼습니다. 참 고마운 충고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볼수록 아내의 그림자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부는 삶 속에서 항상 겹쳐져 있었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각이지만 아내는 항상 내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곧 부부는  20주년을 맞이합니다. 새로운 20년의 계획을 묻자 처음에는 없다고 말하더니 아내는 더듬더듬 몇 개의 단어를 제시했습니다. '이대로', '함께', '웃으며', '건강하게'. 남편은 속으로 '로또 1등'이라고 떠올린 생각을 재빨리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수줍게 '나도'라고 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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